‘노래하는 회장님’ JBC전북방송 이부영 회장

“사진 찍는 게 제일 힘들어요. 차라리 연기하는 게 더 쉬운 것 같아요. 무대에서 노래할 때는 완전 내 세상이죠(웃음).”

얼마 전 2집 신곡 ‘더더더’를 발표하고 활동 중인 이부영(49) 씨는 2009년 4월 첫 음반을 낸 경력 3년 차인 가수다. ‘아직은’ 노래에만 ‘올인’해도 모자랄 신인 가수인데 연기에 MC까지 타이틀도 많다. SBS플러스 시트콤 ‘오 마이 갓’에 고정 출연 중이고 얼마 전엔 KBS 주말 연속극 ‘오작교 형제들’에도 교통과 형사로 깜짝 출연했다. MC 경력은 가수 데뷔와 비슷하다. ‘전국가요대행진’ 등 성인 가요 프로그램의 MC로 활동한 지도 3년 가까이 됐다. 뒤늦게 가수의 꿈을 이루고 멀티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이가 어디 그뿐일까만, 이부영 씨가 주목받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수백 억대 자산가…늦깎이 가수 도전”
음반 2장 발매, 연기에 MC까지 ‘멀티’

2009년 5월 SBS ‘스타킹’에 ‘40대 비’를 표방한 중년 남성이 등장해 화제가 됐다. 비의 ‘지팡이’ 대신 ‘우산’을 들고 ‘레이니즘’을 열창한 그는 전혀 ‘비슷하지 않은’ 퍼포먼스를 너무나 열심히 따라해 큰 웃음을 선사했고 실시간 검색어 1위에까지 올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해 상반기 결선, 연말 결선에도 연달아 출연한 그는 태양의 ‘나만 바라봐’와 백지영과 택연이 함께 부른 ‘내 귀에 캔디’로 또다시 스튜디오를 초토화시켰다.

어설픈 ‘퍼포먼스’가 주는 즐거움은 그의 ‘실체’가 결합되면서 더 큰 화제를 뿌렸다. 그 중년 남성이 수백 억대 자산을 가진 기업인이었던 것. 케이블방송인 JBC전북방송의 회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노래하는 회장님’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그가 바로 이부영 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남진과 나훈아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는 그는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그 꿈을 접어둔 채 살아야 했다. 어릴 땐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가수 하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고 사업을 시작한 후엔 거기에 전력을 쏟느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형제 아홉 명 중 제가 막내예요. 초등학교 때부터 비포장도로 20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죠. 아버지가 조합장을 하시며 집에 땅도 좀 있었는데 그땐 동네에서 누가 비료를 사더라도, 취직을 하더라도 보증 설 사람이 필요했었죠. 우리 마을에 그럴 만한 분이 딱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분이 아버지셨어요. 그러다 보니 누가 비료 값을 내지 않거나 취직 후 사고를 치면 우리 집에 빨간딱지가 붙는 거예요. 초등학교 마친 후 중학교에 갈 형편도 안 돼 한 해를 쉬었을 정도죠.”

다행히 스무 살 차이 나는 ‘아버지 같은’ 큰 형님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줬다. 국립해양대를 나와 외국 배 선장을 했던 형님은 학비는 물론 사업 종자돈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유학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했다. 그 길로 서울행을 택한 그는 유선방송 사업을 시작했다. 환경이 열악했던 당시 그는 직접 케이블 선을 깔러 다니며 동상이 걸릴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도봉음악방송·의정부음악방송 등을 거쳐 케이블TV법이 제정된 후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가 됐다. 그러나 당시 서울은 복수로 허가가 난 탓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던 회사를 매각하고 JBC전북방송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어려운 고비도 숱하게 겪었죠.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상황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저 스스로에게 ‘고생했다’고 말하면서도 여기에 만족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죠.”
“수백 억대 자산가…늦깎이 가수 도전”
연예 활동 후 회사 경영에도 ‘시너지 효과’

현실에 묻혀 잊고 살았던, 아니 잊은 줄 알았지만 내내 가슴에 품고 살았던 가수의 꿈이 그때 다시 되살아났다. 늦었다고 할 때가 빠른 법이라지만 40대 중반을 넘긴 그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고 우연히 한 다리 건너 아는 가수들도 더러 있어 힘이 됐다. 결정적으로 7년 전 사업 운을 묻기 위해 찾아간 점집에서 “연예계로 가겠다”고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이름으로 된 음반이 발매됐다. 회사에도 집에도 전혀 알리지 않았던 터라 주위에선 어리둥절해 했다.

“곡을 받고 1년간 주중 저녁 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노래 지도를 받고 연습했어요. 음반을 낸 후 직원들에게 사인 앨범을 하나씩 나눠줬더니 다들 제가 노래를 좋아해 기념 앨범을 낸 것으로 알더군요. ‘설마 우리 회장님이 진짜 활동을 하시겠어?’라는 반응들이었죠. 지금은 오히려 제가 직원들에게 자랑거리가 됐어요. 지난해 말 송년회 때도 노래를 불러 직원들에게 칭찬받았죠(웃음).”

아내와 딸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역시 기념 앨범쯤으로 생각했던 아내는 본격적으로 방송 활동을 하겠다는 남편을 만류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건 꼭 하고야 마는 남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노래를 못하니 절대 안 된다”며 “아빠가 가수를 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던 딸이 이제는 아빠가 나온 방송을 찾아 보는 팬이 됐다. “제가 사실 박치·음치·몸치거든요. 그걸 딛고 가수가 될 수 있었던 건 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안된다고 할 게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것만으로 이미 반은 성공한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그는 방송 스케줄 때문에 회사에는 1~2주 만에 한 번씩 들러 업무를 보고 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지만 그는 “내가 인복이 있어서 그런지 유능한 간부들과 성실한 직원들 덕분에 방송과 회사 경영을 겸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연예 활동과 기업 경영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뒤늦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건 JBC 회장이라는 타이틀의 공이 컸고 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회사 홍보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기업 회장이지만 권위와 체면을 버리고 낮은 자세로 임한 것도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또 다른 배경이 됐다. 슈퍼주니어 같은 한참 나이 어린 선배 가수들에게도 깍듯하게 ‘선배님’이란 호칭을 붙이고 방송에서도 스스럼없이 망가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저는 기업을 경영할 때도 직원들에게 ‘자존심은 출근할 때 회사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퇴근할 때 찾아가라’고 말했어요.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건 자존심이 아니라 경쟁력이죠.”

사업에 성공한 것보다 가수로서 무대에 설 때가 더 큰 행복을 준다는 그. 생활에 찌들어 웃음을 잃고 살았다는 한 시청자가 그가 망가지는 방송을 본 뒤 웃음을 찾았다며 보내온 감사 편지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욕심 못지않게 기업인으로서의 욕심도 여전하다. 회사 규모도 키우고 싶고 12년 전 세운 엔터테인먼트 회사 ‘아트레인’을 통해 꿈과 재능이 있어도 여건상 도전하지 못하는 이들을 영입해 제2, 제3의 이부영도 만들어내고 싶다. “일 잘하는 사람이 놀 때도 잘 노는 법이죠. 저는 무대에서는 열심히 ‘놀고’ 기업인으로서도 열심히 일할 겁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장소 협찬 카페 네이버후드 (02)325-8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