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권위자’ 김형철 연세대 국제교육원 원장
김형철(57) 연세대 송도캠퍼스 국제교육원 원장은 1988년 시카고대에서 존 롤스의 ‘정의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써 스타덤에 오른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와도 오래전 친분을 맺었다. 분배 정의에 대한 천착은 자연스럽게 기업 윤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흥미롭게도 기업 윤리의 핵심 주제는 최고경영자(CEO)의 리더십이다.
기업 윤리는 ‘바텀 업’이 아니라 ‘톱 다운’ 방식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손꼽히는 리더십 전문가로 이름을 얻게 된 배경이다. 지난해 말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 초청돼 ‘초일류 기업 CEO의 7가지 자격’을 강연해 화제를 모았다. 김 원장은 경영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가장 앞서 주창해 온 주역이기도 하다. 지난 1월 2일 연세대 연구실을 찾아 한국 사회를 이끌 새로운 리더십에 대해 물었다. 모두 ‘위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위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많은 사람이 사회계약이 깨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공정한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느끼는 거죠. 리더는 모든 사람을 함께 끌고 가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각자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이 기회를 ‘원천봉쇄’ 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났어요. 일자리를 잡지 못해 절망하는 젊은 청년들이 대표적이죠. 나이 든 분들이나 사회적 약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복지가 아니에요. 일자리를 원하죠. 인간은 일을 통해 자신을 실현해 나갑니다. 그게 안 되니 복지라도 해달라는 겁니다.
절망감이 더 큰 문제라는 말씀이시군요.
위기는 맞지만 절망적인 의미의 위기는 아니라고 봐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위기가 있는 거죠. 아프리카 젊은이들처럼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위기도 없거든요. 세계에서 한국만큼 글로벌 금융 위기를 잘 극복한 나라가 없어요. 지도층이나 부유층으로서는 ‘그런데 웬 위기냐’는 소리가 나오죠. 기회가 있어 위기도 있는 겁니다. 그 기회가 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대한 불만이 위기로 표출되고 있는 거죠.
또 다른 요인은 없습니까.
지금은 중요한 과도기예요.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잘 설정해야죠. 이는 기업도 마찬가지예요. 자칫 잘나가다 한순간에 방향을 잃은 일본처럼 될 수 있어요. 걱정스러운 것은 기업들의 탐욕이에요. 기업들은 시장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어요. 그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죠. 다만 그렇게 번 이익을 되돌리는 사회 환원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거예요.
또 스티브 잡스는 세계를 깜짝 놀랄게 하는 제품을 내놓는데 한국 기업들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우리 기업들은 너무 많은 것을 제로섬 관점에서 봐요. 시장에서 경쟁자는 목숨 걸고 박멸해야 할 대상이나 적이 아니에요. 통제할 수 있으면 그만이죠. 서로 시너지 효과도 있고요.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반드시 함께 뛰는 파트너가 있어야 하거든요.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차기 리더십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소통의 리더십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소통을 하려면 쓴소리를 즐길 줄 알아야 해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쓴소리하는 것은 쉬워요. 하지만 반대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칼자루를 윗사람이 쥐고 있기 때문이죠. 마키아 벨리가 ‘군주론’에서 군주의 그릇의 크기는 자신보다 똑똑한 부하가 몇 명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어요. 군주가 화를 버럭 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 아랫사람이 쓴소리를 안 해요. 아첨꾼에 둘러싸이게 되는 거죠. ‘손자병법’에선 화를 내는 장수 밑에 있는 병사들은 게으르다고 말했어요. 명령이 떨어져야, 결재가 떨어져야만 움직이기 때문이죠. 이래서는 21세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요. 훌륭한 리더는 쓴소리를 즐깁니다.
리더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합니까.
리더는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리더는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죠. 일을 나눠 주고 책임을 나눠 주는 사람일 뿐이에요. 리더가 일을 열심히 하면 원래 일해야 하는 사람을 간섭하는 게 되죠. 이를테면 대통령이 일하면 아무도 일을 안 해요. 전부 지시가 떨어지기만 기다리죠. 대통령이 시키는 일만 하는 거예요. 또 리더가 책임을 나눠 주지 않으면 주인의식이 생기지 않아요. 최악은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조용히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라’며 책임을 빼앗는 거죠. 이 나라가, 이 회사가 내 것이라는 의식이 생길 리 없어요. 다음 정부가 포퓰리즘에서 벗어나려면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면서 동시에 그들이 책임 의식을 갖도록 만들어야죠.
삼성 사장단 강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장자에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우화가 나와요. 4그루 나무가 저마다 잘났다고 뽐냈는데 재질이 단단하거나 예쁜 꽃이 피는 좋은 나무는 다 베어 가고 구불구불하고 껍데기가 딱딱해 아무 데도 쓸모없는 나무만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어요. 더운 여름이 되자 그 나무 그늘 아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예요. 사물의 쓸모는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따라 결정된다는 거죠. 용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도 쓸모 있어집니다. 기업들이 차세대 먹을거리, 신성장 동력을 찾고 있는데 지금까지 쓸모없다고 제쳐 놓은 것들을 ‘과연 그럴까’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문제의 원인을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찾으라는 거죠.
한국에서도 스티브 잡스 같은 리더가 나올 수 있다고 보십니까.
잡스는 미래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한 리더죠. 삼성은 애플을 빠르게 따라잡아 어깨를 견줄 정도가 됐어요. 삼성이 애플과 똑같이 될 필요는 없어요. 서로 DNA가 다르고 각자 잘하는 방식이 있어요. 문제는 삼성이 애플을 추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앞으로 나갈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방향을 제대로 잡으려면 자신의 현재 위치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내비게이션도 위성항법장치(GPS)를 통해 현재 위치를 잡아내기 전까지는 아무 역할도 못하죠. 잡스는 미래 비전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애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어요. 위치와 방향, 속도가 삼각함수를 푸는 열쇠죠.
CEO들의 인문학 배우기 열풍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십니까.
인문학과 경영학의 만남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일시적 유행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새로운 ‘금맥’이 있어요. 경영학은 항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라고 가르치죠. 하지만 인문학은 자신에게 손해가 큰 쪽으로 결정하라고 충고합니다. 털끝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친구보다 손해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친구가 더 사랑받는 것과 같은 이치죠.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하고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 강대국 미국의 패전을 불렀다고 고백했어요.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을 놓치지 말아야죠. 약력:1955년 부산 출생. 1978년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88년 미국 시카고대 철학박사. 1991년 연세대 철학과 교수. 1997년 계간 ‘전통과 현대’ 편집위원. 2008년 연세대 리더십개발원 원장. 2009년 연세대 리더십센터 소장. 2011년 연세대 국제캠퍼스 국제교육원장(현).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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