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이 연일 기승을 부린다. 오전부터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허리나 목 통증 외에 대부분 감기를 함께 달고 들어온다. 그래서 환자들을 진료할 때마다 감기에 좋은 감을 추천하곤 한다. 감은 비타민C가 사과보다 17.5배 많고 비타민A 또한 사과와 배보다 훨씬 많이 함유하고 있어 감기에 좋다. 몸이 약한 임산부나 유아에게 도움이 된다. 가끔 진료실에 감을 몇 개 두었다가 진료를 마친 환자 손에 꼭 쥐어주며 “허리도 낳으시고, 감 드시고 감기도 빨리 나으세요”라는 말을 전하기도 한다.

환자에게 감을 권하는 이유는 물론 몸에 좋기도 하거니와 환자를 대할 때 왠지 친근해지는 마음이 더 들어서 가끔 준비한다. 감을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 생각난다. 내 마음속에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다.

여주에 있는 시골집은 시커먼 기왓장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올려져 있는 큰 한옥집이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늦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감나무에서 아버지와 함께 감을 따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파트만 있는 서울의 모습과 사뭇 다른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있었던 곳이다. 아버지께서 감을 따실 때는 항상 20개 정도를 따지 않고 남겨두셨다. 먹을 것이 귀했던 그 당시에 감 20개는 내게는 많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 나의 아버지] 먹음직스러운 감 스무 개의 비밀
가끔 “까치밥이 뭐 이렇게 많아! 그냥 다 따서 먹자 응? 아버지, 까치밥은 두세 개면 되잖아”라고 하면서 투덜거렸다. 내가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얘야 보거라 집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감나무에 달린 먹음직스러운 감을 보고 한 번이라도 더 들르게 될 거란다”라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말씀처럼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감을 보고는 들어와 툇마루에 앉아서 “감이 참 맛있게 익었구먼” 하시면서 아버지께 말을 건네곤 했다.

아버지는 “그렇다면 드시게 해드리지”라고 정겹게 얘기하시며 기왓장 담벼락에 사다리를 기대고 올라가시더니 감을 따서 투박한 손으로 쓱쓱 문질러 환하게 웃으시며 손님에게 건네곤 하셨다. 평소 남들에게 대접받기보다 대접하기를 더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집에 오는 손님을 항상 웃으며 반겨주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소박한 정을 느낄 수 있도록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셨다.

이런 아버지의 기억 때문에 의사가 된 지금은 환자를 맞는 내 모습을 자주 되돌아본다. 많게는 하루에 수백 명의 환자와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지만 통증과 함께 병원을 방문하기 때문에 표정이 좋은 환자는 많지 않다. 환자에게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때로는 감을 건네며 웃음을 지어보기도 하고 어르신들에게는 부모님이라고 생각하고 어리광도 피우고 말장난도 쳐가며 치료에 임해본다.

“치료를 받기 위해 진료실로 들어오는 환자를 반기는 미소가 꼭 아버지를 닮았다”는 최근 누나의 말이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살아있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 동장군도 울고 갈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뉴스를 보면 요즘 세상이 훈훈한 것보다 삭막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아버지의 투박한 손에 딸려 나오던 빨간 감처럼 겨울 한파를 녹여줄 훈훈한 소식들이 주변에 많아지길 아버지를 생각하며 기도해 본다.

최봉춘 세연통증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