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역서 20분… ‘마지막 금싸라기 땅’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 따라 내려가다 양재IC로 빠져 다시 내곡IC 방면으로 나가면 시원하게 뚫린 헌릉로에 들어서게 된다.

길 양쪽은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과 밭, 비닐하우스가 대부분인데, 이곳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 사저 문제로 시끄러운 서울 서초구 내곡동이다. 사저 이전이 백지화됐지만 이제까지 몰랐던 지역의 투자 가치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베일에 싸인 ‘내곡동’을 벗기다
>위에서 내려다본 내곡동 능안마을 전경. 왼쪽 끝 교회 바로 뒤쪽에 이명박 대통령 사저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부지가 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내곡동으로 진입하기까지의 시간은 불과 5분여다. 헌릉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아직까지 서울에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녹지가 남아 있나’ 싶을 정도로 개발이 더딘 곳이다. 큰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강남구 세곡동이다.

현재 ‘강남보금자리주택’ 건설이 한창인 이곳도 몇 년 전에는 은곡마을이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어 지금의 내곡동과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다. 서울의 최고 알짜배기 땅인 강남과 지척이면서도 웬만한 시골 마을과 진배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이 일대가 모두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린벨트로 지정되면 부동산 개발 자체가 불가능하다. 벨트 안에 집을 짓고 살고 있더라도 주택 신·개축 시에는 관할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고 대지가 아닌 전(田)으로 구분돼 있다면 시설물이 일절 들어설 수 없다.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한 내곡동 일대가 연일 시끄러운 건 이명박 대통령의 아들인 이시형 씨가 이곳에 땅을 사들이면서부터다. 이 씨는 지난 5월 내곡동 20의 17을 비롯해 모두 9필지, 2606㎡를 청와대 대통령실과 함께 매입했다.

이런 사실이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청와대는 ‘퇴임 후 사저’를 짓기 위해서였다는 해명 자료를 발표했다. 대통령 부부의 사저 부지를 아들 이름으로 사들인 이유에 대해선 “대통령이 들어온다고 하면 땅값이 급등하는 등 부작용이 있어 부득이하게 이런 절차를 밟았다”고 밝혔다.
베일에 싸인 ‘내곡동’을 벗기다
>이 대통령 사저 예정 부지였던 20의 17 입구. 본래 고급 한정식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청와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우선 대통령 부부가 퇴임 후 살 집과 땅을 아들 명의로 먼저 구입했다는 것이 대표적인 편법 증여 수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또 앞으로 이들 부지의 개발이 이뤄지면 막대한 개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분석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사실상의 투기가 아니냐는 비난도 거세다.

실제로 20의 17은 도시지역 제1종 전용 거주 지역으로 구분돼 있는데, 이 씨와 청와대의 부지 구입 직후인 5월 26일 전답에서 대지로 용도가 변경됐다. 20의 17과 바로 붙어 있는 20의 36(259㎡), 30의 8(826㎡)은 현재 그린벨트로 묶여 있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조만간 개발될 가능성이 큰 땅으로 보고 있다.

여러 의혹과 비난이 이어지자 청와대는 급기야 “사저 신축 계획을 백지화한다”고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이미 사들인 내곡동 부지도 국고에 환수할 계획이고 애초 자택이었던 논현동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편법 증여 등 위법 사항 논란이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지만 일단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신축 계획만큼은 물 건너간 것이 확실해졌다.
베일에 싸인 ‘내곡동’을 벗기다
>고급 단독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능안마을 풍경.">
사저 인근 개발 가능서 커

대통령 사저 이전·신축 논란과 관련해 정치권이 연일 입씨름을 벌이고 있지만, 세인들의 관심은 정작 다른 곳에 쏠려 있다. 바로 내곡동이란 땅의 가치다. 이시형 씨가 사들인 내곡동 20의 17 일대인 ‘능안마을’도 주목의 대상이다.

이곳은 원래 ‘수양’이란 이름의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주민들 말에 따르면 정관계나 재계 등 고위 인사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양재IC를 나와 내곡IC 방향으로 헌릉로를 따라 5분쯤 가다 보면 오른쪽에 동네 입구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나온다. 능안마을 입구다. 이곳은 예부터 홍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으로, 지금도 능안마을 바로 옆을 ‘홍씨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로 경계나 구분이 없어 사실상 하나의 마을과 같다.
베일에 싸인 ‘내곡동’을 벗기다
>고급 단독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능안마을 풍경.">
한낮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한적한 이곳은 같은 서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하고 공기도 맑다. 현재 마을에는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마을 토박이들과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한데 섞여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을 지키고 있는 집들은 한눈에도 낡고 허름한 집들인데 비해 성북동이나 평창동 같은 부촌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고급 주택도 많다. 대부분의 집들이 정원이 딸린 널찍한 부지에 개인 차고 등을 갖추고 있을 만큼 부촌이다.

14대째 마을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는 조순희(80) 씨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산 밑자락을 좋아해 터를 잡고 산다”고 말했다. 조 씨는 “1970년대 취락지구로 개편되면서 돈이 없어 집을 못 짓는 주민들이 ‘딱지’를 팔고 나갔고, 그 자리에 하나둘씩 외지인들이 들어왔다”고 덧붙였다.
베일에 싸인 ‘내곡동’을 벗기다
> 능안마을에서 1.5㎞ 떨어진 곳에 건축 중인 생활체육시설.">
능안마을은 주민들이 목등산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산 밑 언덕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목등산 바로 뒤쪽에는 예비군 훈련장이 있고 그 뒤로 인릉산 자락이 이어진다. 이 대통령이 사저 부지로 삼았던 곳은 목등산 바로 아래로, 마을에서 보면 언덕의 가장 높은 지대다. 사저 부지 뒤가 모두 산이기 때문에 경호상으로도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현재 거주 지역으로 지정돼 있는 곳을 제외한 그린벨트 내 시세는 3.3㎡당 50만~500만 원 수준. 서울 지역 땅값 치고는 터무니없이 싼 가격인 데는 개발이 제한돼 있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실제로 마을 곳곳에는 개발제한구역을 알리는 말뚝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20의 17과 같이 전용 거주 지역으로 지정된 곳은 3.3㎡당 1500만 원에서 2000만 원을 호가한다. 대지 지분만 그렇고 여기에 건물 가격까지 합하면 전체 가격은 수십억 원을 호가한다고 볼 수 있다.

목등산 자락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홍모(57) 씨는 “보금자리지구나 대통령이 들어와 살 땅만 그린벨트에서 해제해 주는 이유가 뭐냐”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제대로 된 재산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며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앞서 만난 조 씨도 “대통령이 오면 마을 입구 쪽에 공원이 생긴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아파트도 들어서고 대통령까지 오면 개발이 잘 될 텐데, 왜 못 들어오게 하느냐”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
베일에 싸인 ‘내곡동’을 벗기다
>아직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지 않은 보금자리주택 지구. 뜯겨진 비닐하우스와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개발의 핵심 ‘보금자리주택’

사실 내곡동은 부동산 업계 전문가들 사이에선 오래전부터 ‘강남의 마지막 금싸라기 땅’이라고 불리며 일찍부터 주목받아 온 곳이다. 우선 양재역까지 자동차로 2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을 만큼 지리적 여건이 뛰어나다. 여기에 경부고속도로, 분당~내곡 간 고속도로, 헌릉로, 용인~서울 간 고속도로 등 서울 도심과 수도권으로의 접근성도 매우 훌륭하다.

내곡동 개발의 핵심은 ‘보금자리주택’ 지구다. 서초구 내곡동을 주축으로 신원동·원지동·염곡동 일원의 76만9000㎡ 부지에 들어설 보금자리주택은 총 5000호 규모(보금자리주택은 4000호)의 대형 주택(아파트) 단지로 2013년 6월에 입주가 시작될 예정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청계산·인릉산 등의 자연환경과 연계된 그린 네트워크와 여의천 등이 어우러진 친환경 주택 단지로 설계한다는 방침을 이미 밝혔다.

수도권이 아닌 서울 안에 이 같은 대규모 개발이 진행될 수 있는 곳은 지금으로선 내곡동이 유일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이 지역에는 보금자리주택 건설과 함께 신분당선 청계역사도 개통될 예정이어서 개발 가치는 더욱 커졌다.

내곡동 보금자리주택 부지에서 내곡IC 방향으로 3분여 거리에는 이미 ‘강남보금자리주택’ 건설이 한창이다. 행정구역상 강남구 세곡동에 속하지만 내곡·세곡 지구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놓고 본다면 인근의 우면2지구까지 합쳐 미니 신도시급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 사저 이전 논란과 내곡동 투자 가치가 화제가 되면서 이 지역에 땅을 소유한 유명 인사들도 주목받는다. 20의 17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500여m 떨어진 곳에는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의 땅이 있다. 이 의원이 소유한 땅은 62의 18 등 총 6필지, 1458㎡에 이른다. 역시 그린벨트에 속해 있어 현재로선 개발 계획이 없다.
베일에 싸인 ‘내곡동’을 벗기다
보금자리주택 건설이 예정된 내곡지구 안 106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부인 송현옥 씨의 땅이다. 송 씨는 106 전체 면적 1109㎡ 중 148.75㎡를 소유하고 있다. 송 씨는 이미 같은 번지 안에 406.63㎡의 땅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보금자리주택 지구로 포함되면서 지난해 수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토지 수용 보상금은 40억 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보금자리주택 부지 안에는 1만2818㎡ 규모의 수변공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184의 1 일대에도 소공원이 들어설 계획이다. 지구 안의 하천인 소하천을 활용할 예정인데, 공원이 조성되면 사저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능안마을과 보금자리주택 지구 사이에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마을 주민 조순희 씨는 “대통령이 들어오면 마을 입구 구멍가게 앞 부지에 공원이 들어선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능안마을을 나와 큰길(헌릉로)에서 내곡IC 방면으로 가다 예비군훈련장 쪽으로 방향을 틀면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땅이 나온다. 내곡동 1의 16 8730㎡ 규모의 유휴지로, 서초구가 2007년 60억 원을 들여 산 땅이다. 애초에 구는 이곳을 쓰레기 매립지로 활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사업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생활체육시설’로 용도를 변경했다. 현재는 테니스장 6면과 주말농장 건설 등이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 사저 부지와는 1.5km, 이상득 의원 소유 땅과는 1.7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현재 내곡동은 보금자리주택 지구와 일부 토지를 제외하고는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현재로선 추가적인 택지지구 건설 계획이나 공공시설 건설 같은 개발 호재는 없다. 하지만 보금자리주택이 개발되며 관련 도로와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하면 개발 압력이 거세지면서 자연히 그린벨트가 풀릴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가 많다.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의 마지막 금싸라기 땅이라고 불릴 만큼 내곡동의 잠재 가치가 크다는 뜻이다.


취재=장진원 jjw@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