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전기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수력발전소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귀향해 전기공사 사업체를 설립하셨다. ‘강원도 전기공사 면허 2호’가 의미하듯 발 빠른 사업 진출로 당시 농어촌 전기 개통 사업으로 공사가 널려 사업이 성황을 이뤘다. 가난했던 196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풍족했다. 전문가 기질이 충만했던 당신은 어려운 공사일수록 물불을 가리지 않으셨다. 당시 태백 준령을 이어 가는 송전탑 공사는 위험천만한 난공사였다.
장비라고는 손수레밖에 없는 상황에서 송전탑 건설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지금은 헬기에 각종 기중기 등 중장비들이 즐비하지만 당시는 트럭 한 대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길이 없어 일일이 사람들 손으로 벌목과 길 내기, 손수레로 송전탑 장비를 옮기는 원시시대 같은 상황이었다.
작업 중 사망 사고도 속출하는 난공사라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지는 위험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사업가들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지천인 까닭에 어렵고 골치 아픈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겠지만, 아버지는 이런 일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며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다.
수차례 심부름으로 간 강원도 오지 공사 현장에서 첫 전기 개통으로 마을 사람들이 환호하는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전기 개통은 천지개벽이고 진짜 광명을 경험하는 환희의 순간이어서 마을 사람들의 감격은 대단했다. 그 경험은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갖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도전 정신과 전문가 기질은 알게 모르게 옆에서 지켜보던 내게도 수혈돼 20년 이상 한 분야의 전문가로 매진하도록 하는 힘이 되고 있다.
반면 아버지 회사의 내부 관리는 엉망이었다. 아버지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고 지역사회에 소문이 자자했다. 내부 직원들의 착복과 빚보증 등으로 가계는 나날이 기울어 갔다. 외형상으로는 호황인데 내부는 곪는 꼴이었다. 고등학생이 될 무렵 집 안에서 심심치 않게 빨간 스티커를 볼 수 있게 됐다. ‘압류장’이 집 안 세간에 많이 붙을수록 어린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대학 학비가 걱정이 될 지경이라 목표 의식도 없어져 인생무상의 침체기를 조기에 경험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빚보증의 위험을 절절하게 교훈으로 간직하는 조기 교육의 산 현장이었다. 그런 아픈 경험은 지금도 거래에서 중요한 관점이 되고 있다. 남에게 자금을 빌리거나 보증을 서달라는 부탁은 아예 내 사전에 없는 것이고 반대로 그런 부탁을 결연하게 거절하는 습관이 생겼다.
지금 내 자식을 보면 내 삶 자체가 그 아이에게도 큰 교훈인 것 같다. 물론 같이 여행도 하고 대화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내 삶 자체가 주는 영향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모든 면에서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아버지의 삶을 인정해 주고 이해해 줄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나는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삶의 경로를 이해하고 있고 그 삶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는다.
조재형 피알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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