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내 인생의 두 아버지
아버지는 고향에서 시발자동차를 만들던 분이시다. 맏이인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돌아가셨으니 나를 제외한 내 동생들은 아버지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이의 많은 것들을 기억한다.

그리 술을 잘 드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형제나 가족들과 어울렸을 때는 막걸리 몇 잔에 흥이 나 릴 테이프가 꽂힌 녹음기 마이크를 잡고 멋들어지게 ‘복사꽃 능금꽃이…’하던 노래나 ‘철수야 내 아들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것 중 가장 가슴에 깊이 새겨진 것은 어느 날, ‘칭기즈칸’이라는 영화 포스터를 보고 그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 아버지 주머니에 손을 댄 일이다. 그때 나는 ‘내일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영화를 봐야지’하며 가슴이 부풀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아버지는 저녁 밥상머리에서 내게 “내일 저녁에 우리 칭기즈칸 영화 보러 가자”고 하시는 게 아닌가. 난 몹시 기뻤지만 한편으론 찜찜했다. 그리고 다음날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며 아버지는 내게 “영화가 보고 싶으면 말을 해. 아버지도 영화 좋아하잖아”하시는 것이었다. 아, 그때의 난감함이라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알거지 신세가 됐다. 정말이지 몇 끼니씩 굶는 건 다반사였다. 그런 내게 같은 중학교의 덩치 큰 친구들이 보내는 은근한 눈길은 자못 유혹적이었다.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 일단 점심에 라면 한 그릇을 먹는 것은 보장됐으니 말이다.

어느 날, 그 친구들과 어울려 교복의 호크와 위 단추 하나를 풀고 시내를 활보했다. 그런데 큰이모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고는 두말없이 ‘집으로 오너라’라고 했다.

요즘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교복의 호크와 단추를 풀고 어슬렁거리는 짓은 아주 위험한 불량 신호가 분명했다. 집으로 찾아간 내게 이모부는 딱 한마디, “아비 없는 호래자식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으냐!”였다.

그리고 방 안에 나를 혼자 무릎 꿇려 앉혀 둔 채 집을 나가셨다가 저녁 늦어서야 돌아와 이모에게 밥상을 차리게 했다. 밥상머리에서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특별히 신경 써 차린 게 분명한 밥상뿐이었다.

‘아비 없는 호래자식.’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였고, 혼자 있으면서도 눈물을 한없이 쏟았다. 난 그때부터 차라리 굶으면 굶었지 건들거리는 짓과는 이별했다.

나는 덩치가 꽤 큰 편이다. 커서는 서울시경 강력계 형사를 지내기도 했다. 난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내가 호래자식 소리에 눈물을 쏟지 않았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내게 사랑과 정직을 가르쳤다. 뭐, 살다 보니 가끔 거짓말을 하는 때가 있어 아버지의 가르침을 어기는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사랑만큼은 넘쳐나는 편이다. 또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무나 잘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나누어 주는 건 썩 잘하는 편이다. 그건 사람들이 그럴 때의 내게 별반 거부감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아버지에게 큰 유산을 물려받은 셈이다. 그리고 내게 두 번째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큰이모부는 흔들리는 나를 잡아주신 분이다.

나도 내 자식에게 잔소리가 꽤 많은 편이다-그런데도 녀석들이 나와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는 건 아마도 내가 사랑을 나눠주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내 아버지의 유산 때문일 것이다.

김정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