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창조의 역설

[CEO를 위한 상상력 교실] 자신의 생 바깥에 의연하게 서 보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유명한 명제는 정신을 몸보다 우위에 놓고 몸은 그저 정신을 지탱하기 위한 도구로 취급한다.

메를로 퐁티 등 후대의 철학자들이 몸과 영혼의 일치를 주장하며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을 비판했지만 재미있는 것은 현대인에게 다시 다른 의미에서의 이분법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내 몸에 진 빚을 갚는다’는 어느 광고 카피가 보여주듯, 이제 현대인들은 오히려 몸을 우위에 두고 정신은 몸 때문에 존재하는 것같이 취급한다.

필자의 동료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너는 참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한다’고 얘기한단다. 우리는 언제부터 자신의 몸을 아끼고 측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요즘 방영되는 ‘49일’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죽고 싶은데 사는 여자와 살고 싶은데 죽은 여자가 ‘하나의 몸’을 통해 서로에게 의지해 절반씩 살아간다는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49일 안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세 사람의 눈물을 얻으면 살 수 있다는 가정 하에, 한마디로 ‘자신의 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 선 그 위치다. 왜냐하면 그 위치는 우리 삶의 역설, 그리고 우리가 궁금해 하는 ‘창조’의 역설과 의미가 생겨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생일은 생애주기 체험일

‘생애주기 체험’이라는 것이 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인간의 삶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체험해 지금 자신이 처한 현재 위치와 삶의 목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한 개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민속박물관 전시실을 관람한 후 한 페이지로 나의 생애주기 이야기를 작성해 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태어났을 때와 어린 시절, 중·장년기의 내 모습, 노년의 모습, 심지어 자신의 죽음도 생각해 보면서 유언서나 묘비명을 미리 작성해 볼 수도 있다. 최후의 순간에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 자신이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과 삶을 어떻게 계획해 볼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체험해 보고 나면 지금 현재 시점의 자신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전 인류의 맥락, 자신의 생애 전체의 맥락이라는 거시적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고 재구성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이 프로그램을 사내 직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기를 권한다. 직장 생활에 쫓기는 사람들일수록 그들 앞에 닥쳐오는 크고 작은 시련과 절망의 순간에 대처할 면역력이 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밀어 닥치는 파도를 의연하게 맞이하려면 자신의 생 바깥에 서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원들의 생일을 ‘생애주기 체험일’로 의미를 부여하고 축하해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생일이 소중한 것은 탄생의 순간과 환희를 환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생일은 생애주기 체험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나이에 무슨 생일을 꼬박꼬박 챙겨’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마음껏 축하해 주고 축하받아야 한다. 생일은 마라톤 생의 여정에서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1년마다의 중요한 지점이다.

우리는 교대로 지구를 지킨다

광고 CF에 삽입돼 더 유명해진 다니카와 타로의 ‘아침 릴레이’라는 시가 있다. “캄차카의 젊은이가/ 기린의 꿈을 꾸고 있을 때/ 멕시코의 아가씨는/ 아침 안개 속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 이 지구에서는/ 언젠가 어딘가에서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우리들은 아침을 릴레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에서 누군가로 아침을 릴레이하며 살아가고 있다. 바꿔 생각하면 누군가의 생명을 전해 받고 전달해 주는 생명 릴레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막 태어난 아기들은 이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생명을 릴레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의미와 생명을 위해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몸을 빌려 릴레이 하듯 49일을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릴레이하며 사는 전 인류의 은유로 읽힌다.

동영상 하나가 생각난다. 장례식 장면인데,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는 가운데 죽은 남편의 부인이 유가족 대표로 나와 이야기한다. 그녀의 남편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평범하냐면 잘 때 트랙터 지나가는 소리로 코를 곤단다.

그녀의 말에 울고 있었던 사람들이 약간 미소를 짓는다. ‘방귀 소리도 엄청나게 커서 매번 바지가 뜯어지는 줄 알 정도였다’고 하자 사람들이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런데 남편이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그 조금의 불완전함’이 자신의 생에 완전함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숙연해진다.

그녀는 딸에게로 걸어가 딸을 안아주면서 마지막으로 말한다. “얘야, 아버지처럼 아름답게 불완전한 사람과 결혼하렴.” 이 동영상은 칸 광고 영화제 수상작이다. 결혼하는 연인들의 밝은 분위기를 장례식이라는 가장 무거운 죽음의 분위기와 오버랩하면서 시작과 끝, 삶과 죽음, 슬픔과 환희의 뒤얽힘을 감동적으로 표현해 냈다.

헤밍웨이의 유명한 묘비명 “일어나지 못해 미안허이!”가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여유를 생각해 보라. 프랑스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의 “그대여 내 무덤에 구명조끼를 놓아주길/혹시 모르니까”라는 시구는 또 어떠한가.

이 재미있는 구절은 ‘혹시 내가 살아날지도 모르니까’로도 읽히지만, ‘혹시 내가 안전한 죽음에서 위험한 삶으로 나올지도 모르니까’로도 읽힌다. 이렇게 읽어볼 때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의 가치가 완전히 뒤바뀐다.

삶은 무겁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이라는 통상적인 인식을 창작자들은 뒤집는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가치를 바꾸고 이를 통해 더욱 강렬한 생의 의미를 밝혀내고 있다.

삶과 죽음의 역설적인 대비는 인간의 유한함을 초월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이런 창작자들의 태도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절망의 끝에 몰렸을 때 눈을 질끈 감고 회피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절망과 연결돼 있는 희망의 시작을 발견하고 새로운 생에 눈뜰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생을 미리 그려보는 생애주기 체험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삶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조윤경 이화여대 교수·경기창조학교 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