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배(대구 근방) 분으로 일제 하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한때는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셨다고 한다. 섬유업이었던 것 같다. 6·25전쟁 후에는 직물업을 크게 해 나름대로 영남 지역의 거부로 알려졌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대구 지역이 섬유업의 중심지였다.
내 어린 성장기에는 이를 알 턱이 없었지만 나중에야 알게 됐다. 이 지역의 섬유 수출업이 꽤나 번성했다는 기록을 보아 알게 됐다. 그냥 직물 공장과 많은 사람(종업원)들 틈에서 지냈던 기억 속에, 돌이켜 보면 늘 바쁘고 힘들게 지내신 분이었다. 참 열심히 사시는 분이었다. 대학 진학 때 전공을 경영 경제 분야로 하겠다고 했더니, 하시는 말씀이 그것보다 한문학을 하라고 하시지 않는가. 한참을 망연자실했었다. 평소의 말씀이 내 평생 직업으로 삼으시라는 뜻이었던가 하는 생각에 그러했다. 이런 내 모습에 놀라셨는지 아버지는 한문학이 내키지 않으면 중의학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해 한 번 더 놀랐다.
‘문과에서 이과로 바꾸란 말씀이신가’ 하고 말이다. 내가 묵묵부답하자 더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이후 나는 경영학을 전공 분야로 선택해 이제 교수직으로 평생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왠지 인문 분야에 대한 막연한 의무감을 늘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문 분야의 글과 이 분야 교수님들의 말씀이나 강좌에 귀를 기울인다.
한참 늦은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초가을 어느 날, 선산에서 벌초와 흙 작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처럼 몸소 삽과 낫을 들고 일하시는 모습을 처음 봤다.
선대 할아버님들의 묘소들을 정리하느라 몇 달 째 매일같이 오르시곤 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뵈었다가 맞닥뜨린 모습이었다. 다소 의아하면서도 놀랐다. ‘왔나’ 하시곤 앉으라고 하면서 이곳저곳을 가리키시더니 저쯤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해 가을 그렇게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참으로 예감을 갖고 있었나 보다.
나는 10년째 주말에 근처에 있는 조그만 밭을 가꾸러 가곤 한다. 이 나무 저 나무 묘목을 수백 그루 기르다 보니 각기 다른 특성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도무지 같은 나무가 없다.
이 중 황금회화가 매우 특이하다. 어린 묘목을 어렵게 한두 해 기르고 나면 그 예쁘고 작은 연두색 잎을 먹겠다고 달려드는 노란 병충을 막아야 한다. 이를 넘기면 가지가 정말이지 마구 솟아나오는데 정신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를 두세 해 넘기면 스스로 멋진 모습으로 태어난다. 가지를 잘라주지 않아도 황금색의, 정확히 표현하면 연두 황금색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멋진 자세를 뽐낸다. 이렇게 살고, 이렇게 키워내고 싶을 뿐이다. 이 모두를 행동으로 나를 깨우쳐 주신 아버지 모습처럼 말이다.
이승창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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