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큰소리로 나무라지 않으셨다. 당위성으로 가르치지도 않으셨다. 궁핍하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 좋았다.

어느 날 아침 면도를 하다가 거울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아! 아버지.” 그러나 거울 속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었다. 이제 내 나이 마흔아홉, 아버지가 쉰셋에 돌아가셨으니 지금의 내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아! 나의 아버지] ‘촌철살인’의 기억
아들이 태어났다. 강보에 싸여서 눈도 못 뜨는 아이를 보면서 아버지를 생각했다. 이 아이가 자라서 내 나이가 되었을 때, 내가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의 애틋함과 그리움의 절반만 가질 수 있어도 나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내게 월 3000원의 용돈을 주셨다. 그 돈을 어디에 쓰든 상관없었지만 다음 달 용돈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자별 사용 금액과 내용을 기록해야 했다. 아버지가 요청한 것은 딱 한 가지, 실제로 쓴 그대로 기록하라는 것이었다.

첫 달 용돈 3000원을 받았을 때, 하늘을 날아갈 듯 가슴이 벅찼고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았다. 당시 만화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 나는 용돈을 받은 첫날, 만화가게에서 2700원을 썼다. 그 후 29일 동안은 남은 300원을 가지고 큰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용돈 수첩을 검사 받는 날이 다가왔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형이 내 수첩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이 조언해 줬다. “야, 하루에 2700원 썼다고 쓰면 어떡하냐, 이거 얼른 고쳐서 한 열흘쯤으로 나누어 기록하도록 해”, “아냐, 아버지가 쓴 그대로 기록하라고 했는데….”

내 용돈 사용 기록을 본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셨다. 한참을 망설이시던 아버지는 먼저 나를 칭찬하셨다. “네가 정직하게 기록했구나. 그건 참 잘한 거다. 그런데 용돈의 90%를 첫날 쓴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제 용돈이니까 제 마음대로 쓰라고 하셨잖아요!” 나는 따지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네가 300원으로 29일을 지내도 큰 부담이 없는 것 같으니, 이번 달부터는 용돈을 500원으로 하면 되겠구나.”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나는 바로 생각을 바꿔먹게 되었다.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 규모 있게 돈을 쓰는 연습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아버지의 의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열한 살 아들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 무릎 꿇게 하는 촌철살인의 한마디까지, 그날 아버지는 정말 멋졌다.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내고 다섯 남매를 홀로 키우셨던 아버지. 좋은 상대가 많이 있었지만 자식이 혹시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봐 선뜻 재혼을 결정하지 못하셨던 아버지(그때 재혼하셨으면 더 오래 사셨을지도 모른다).

버스를 타지않고 30분을 걸어서 모은 돈으로 5남매 용돈을 주시고 하루에 담배 한 갑 금액을 모아서 5남매 육성회비를 준비하셨던 아버지. 약주 한잔 하시면 ‘빙글 빙글 빙글빙글~’ 큰소리로 노래하며 들어오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큰소리로 나무라지 않으셨다. 당위성으로 가르치지도 않으셨다. 궁핍하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 좋았다. 자랑스러웠다. 아버지 옆에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든든했다.

이제 내 나이가 내 기억 속의 아버지 나이를 지나가고 있다. 지금의 나는 아버지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넉넉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 현숙한 아내가 집안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고, 내 아이는 내가 자랄 때보다 훨씬 풍족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아버지만큼 내 아이에게 좋은 기억, 따뜻한 마음을 심어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럼, 한 달 용돈 500원이면 되겠지~.” 기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눈빛과 그 촌철살인이 그립다.
[아! 나의 아버지] ‘촌철살인’의 기억
김형곤 (주)366비즈센터 대표

기업 경영자들 사이에서 ‘CEO 가정교사’로 통한다. 경영자 교육과 창업자 훈련을 주로 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김형곤의 실전사장학 시리즈’ 1~2권이 출간됐고 3~5권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