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돈을 더 받은 것 같아”라고 하시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며칠 뒤 20리 밖 읍내 시장에까지 가 그 돈을 되돌려주고 오셨다. “내 돈이 소중하면 남의 돈도 소중하지. 그 몇 푼 속여 무슨 큰 득 보려고….”
[아! 나의 아버지] 순수와 정직의 DNA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들과 함께한 세월보다 이별한 세월이 어느덧 더 길게 됐다. 아버지란 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한참 생각했다. ‘다가갈 수 없는 근엄한 분’, ‘다정다감한 분’, ‘큰 바위 얼굴 같은 분’….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랬다. 아버지는 촌로(村老)였다. 나이 쉰에 늦둥이인 나를 얻었다. 하지만 쪼들리는 살림에 풍족하게 먹이지도 못하고 남들보다 나은 환경에서 키우지도 못한 점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 자식에게 ‘어떤 존재’라는 것을 거의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다. 가끔 약주를 한잔 하시면 “사내는 큰 뜻을 품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보일 듯 말 듯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참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가정을 가져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한 ‘새로운 아버지’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하루는 수업 시간에 갑자기 친구들이 “네 아버지 오신다”라고 말했다. 놀라 밖을 쳐다보니 아버지가 양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교무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창피한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얼마 안 있어 담임 선생님이 불렀다.

아버지가 “면사무소에 오는 길에 선생님을 위해 먹을 것 좀 가져 왔다”라고 말씀하신다. 감자·도토리묵·막걸리 등이었다. 어린 생각에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얼마나 정겹고 순수하시냐”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

아버지의 이 같은 ‘순수함’은 내게도 그대로 남아 있다. 얼마 전 휴일 날 초등학생인 막둥이와 축구를 하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막둥이는 오지 않았다. 성당 컴퓨터실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축구가 하기 싫어서 아빠와의 약속을 어겼지”라고 다그쳤다. 매를 들고 혼을 냈다. 그때 아내가 “참 순진하시긴….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그 말을 다 믿어요”라고 핀잔(?)을 주었다.

내가 어릴 때 시골 농촌은 집집마다 소를 비롯해 돼지·닭·흑염소 등 가축을 키웠다. 소를 일컬어 ‘재산목록 1호’라고 했다. 이들 가축들은 영농비·학비 등에 들어갈 현금을 융통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하루는 염소 몇 마리를 팔았다. 돈을 건네받은 아버지는 중개인이 가고 난 뒤에도 한참을 돈을 세어 보셨다. “아무래도 돈을 더 받은 것 같아”라고 하시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며칠 뒤 20리 밖 읍내 시장에까지 가 그 돈을 되돌려주고 오셨다. “내 돈이 소중하면 남의 돈도 소중하지. 그 몇 푼 속여 무슨 큰 득 보려고….”

나는 지금도 ‘정직과 믿음’을 제일의 신조로 삼고 있다. 친구 사이는 물론 직장에서도 정직하지 않은 것을 제일 싫어한다. 재외동포재단에서도 항상 정직과 믿음이라는 두 단어를 머리에 새기고 있다.

특히 재단의 성격상 이 두 단어는 내게 생명과도 같다고 여긴다. 머나먼 타국 땅에 있는 재외 동포 분들이 고국을 방문하는 길에 재단을 찾을 때가 많다. 이런저런 민원성 부탁이 있지만 그때마다 “노(No)”라고 할 때가 더 많다. “좀 더 따뜻하게 대할 것”이라고 후회도 해 보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러 받은 ‘정직’이라는 단어 앞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휴일 날 외부 약속을 거의 잡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소중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건강하고 사랑스럽게 자란 것은 가족이라는 희망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모순덩어리일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좋은 아버지’로 태어나기 위해 노력해 본다.
[아! 나의 아버지] 순수와 정직의 DNA
강남훈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

1958년생. 1981년 서울대 농업교육학과 졸업. 1988년 국제신문 사회부·경제부·체육부 기자. 1995년 국제신문 서울정치부 차장. 1999년 국제신문 정치부장(서울). 2001년 부산광역시 홍보정책보좌관(부산시장 홍보특보). 2008년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