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구두 산업 부활 날개 펴나

23일 서울 명동에 오픈한 세계적인 슈즈 브랜드 나인웨스트 매장에서 올 봄에 유행할 형형색색의  에나멜 슈즈를 선보이고 있다./김영우 기자youngwoo@hankyung.com20080123..
23일 서울 명동에 오픈한 세계적인 슈즈 브랜드 나인웨스트 매장에서 올 봄에 유행할 형형색색의 에나멜 슈즈를 선보이고 있다./김영우 기자youngwoo@hankyung.com20080123..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구두 상품권은 최고의 인기 선물이었다. 국내 구두 산업의 전성기인 1993~1994년에는 백화점 구두 매장에 몰려드는 손님 때문에 보호선을 치고 영업을 했던 호시절도 있었다.

금강제화·에스콰이아·엘칸토 등 토종 국내 제화 업체의 인기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되기 전까지 최고조를 달렸다.

패션의 메카인 명동 번화가에는 아예 ‘제화의 거리’라고 이름난 길이 있었고 금강제화의 각 브랜드 매장만 5개가 넘었다. 3개 메이저 브랜드가 함께 기획안 ‘슈즈 쇼’가 열릴 만큼 국내 구두 시장은 최고의 활황을 달렸다.

지금은 어떨까. 제화의 거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구두 매장은 금강제화 1곳이 유일하다. 2000년대 말 들어 하루가 무섭게 치솟는 임차료와 구두 브랜드의 인기 하락이 겹치면서 매장을 철수하는 수모를 맛봐야 했던 것이다.

국내 제화 업체가 찬밥 신세로 전락한 건 백화점에서도 마찬가지다. 2009년 2월 ‘업계 1위’인 금강제화가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서 퇴출된 예가 상징적이다. 당시 현대백화점에 입주해 있던 브랜드 중 금강제화의 매출액은 6위에 머물렀다. 국내 제화 업계 1위의 자존심으로 12년간 ‘갑’의 위치에 섰던 브랜드가 초라한 신세로 쫓겨난 것이다.

역시 국내 메이저 브랜드 중 하나였던 ‘에스콰이아’는 아예 회사가 매각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61년 설립된 에스콰이아는 지난 2002년 매출액 2500억 원을 정점으로 2009년까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급기야 2009년에는 사모 펀드인 H&Q아시아 퍼시픽 코리아에 매각됐다. 에스콰이아는 이보다 한 달 앞서 명동 본 매장을 신발 카테고리 숍인 ABC마트에 팔기도 했다.

수입 브랜드 인기…1등 자리 내줘
프랑스 명품 남성구두 브랜드 벨루티는 3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더 파인트리에서 델라 컬렉션을 출시했다. 고객들이 새 제품을 구경하고 있다./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프랑스 명품 남성구두 브랜드 벨루티는 3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더 파인트리에서 델라 컬렉션을 출시했다. 고객들이 새 제품을 구경하고 있다./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엘칸토’도 마찬가지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부도 처리된 엘칸토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기사회생하는 듯했지만 2004년 6월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이듬해 모나리자가 사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두 업체 ‘빅3’가 위기를 맞은 것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다. 1997~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한 번 휘청거리긴 했지만 본격적인 ‘위기’나 ‘추락’ 같은 말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며 제화 업계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변화를 주도한 건 수입 브랜드의 국내 진출이었다.

한국신발산업협회 자료에 따르면 2000년 국내 신발의 수입 규모는 2억7400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런데 2004년 들어서는 연평균 19.2%로 급신장해 5억5300만 달러를 기록했다. 2002년 이후부터 수입이 수출 규모를 초과하는 입초(入超) 현상이 나타났고 이후에는 격차가 더욱 심하게 벌어졌다.

수입 확대는 자연히 외국 브랜드에 대한 인기로 이어졌다. 현재 글로벌 브랜드가 운영하는 수입화는 국내 제화 시장의 절반, 백화점 매장에선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토종 브랜드가 해외 브랜드에 밀린 이유는 명확하다.

트렌디하고 개성이 강한 수입품 디자인에 비해 기성화 특유의 ‘올드함’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70~1980년대만 해도 기성화에 기를 펴지 못하고 사라졌던 ‘살롱화(소품종·개인별 맞춤 구두)’가 이제는 시장의 주축이 된 것도 소비자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낳은 변화 중 하나다.

구식 마케팅도 국내 제화 업계의 발목을 잡은 요인이다. 대표적인 것이 ‘구두’라고 하면 떠오르는 ‘상품권’ 전략이다. 과거 금강제화·에스콰이아·엘칸토 같은 대형 브랜드가 발행하는 상품권은 구두 판매 실적을 끌어올리는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백화점 상품권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구두 상품권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다양한 제품과 브랜드가 한 곳에 몰려 있는 백화점 상품권이 인기 있는 건 당연지사다. 여기에 무리한 상품권 발행을 통한 ‘제 살 깎아 먹기 식’의 가격 할인 경쟁은 제화 업계의 하향세를 부채질했다.
[비즈니스 포커스] 다품종 소량생산…10년 불황 '기지개'
에스콰이아, 8년 만에 흑자 전환

사실 국내 구두 산업의 부진은 신발 산업 전체의 부진과 맞닿아 있다. 2000년대 초반 2조3140억 원이었던 신발 산업 생산액은 이후 계속 떨어져 2005년에는 1조6510억 원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2005년을 기준으로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여 2009년 현재 2조910억 원 수준을 회복한 상태다.

2005년 이후 국내 시장이 회복세에 접어든 건 기능성 신발과 워킹화 등 브랜드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기능성 신발의 국내 시장 규모만 3000억 원 정도로 성장했고 아웃도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트레킹화 신제품도 봇물을 이뤘다. 토종 브랜드인 ‘트렉스타’는 세계 시장점유율 16위, 아시아 지역 1위를 차지하며 해외시장 공략에 성공하기도 했다.

신발 산업 전체가 ‘제2의 전성기’에 들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구두 산업도 점차 활력을 되찾고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사모 펀드에 팔렸던 에스콰이아의 부활이다. 에스콰이아는 매각 후에도 좀체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2002년 2400억 원이었던 매출액은 2009년 1700억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변화는 2010년부터 시작됐다. 상반기부터 매출이 반등하기 시작해 8년 만에 ‘턴어라운드’에 성공한 것. 2010년 매출은 1913억 원으로 전년 대비 12% 성장했다.

구두 시장이 한 해 4~5% 정도 성장하는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성과다. 에스콰이아는 흑자 전환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해 7월 전 직원이 회사 앞마당에 모여 바비큐 파티를 열기도 했다.

에스콰이아의 조원익 사장은 “에스콰이아라는 이름만 빼고는 다 바꿨다”라고 말한다. 제일 먼저 착수한 건 구조조정이다. 13개에 이르던 브랜드를 8개로 줄였다. 살아남은 브랜드도 각각의 콘셉트를 다시 설정하고 정리하는 데만 4개월을 투자했다. 업계 최초로 ‘브랜드 매니저’ 제도도 도입했다. 디자인에서 영업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담당하는 매니저 제도는 일원화되고 전문화된 생산 체제를 가져왔다.

에스콰이아라는 이름을 버리다시피 하고 브랜드 관리에 매진한 결과는 놀라웠다.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일러스트 캐릭터 브랜드 ‘소노비’의 매출액은 2009년 60억 원에서 2010년 120 억 원으로 뛰어올랐다.

컴포트화(굽이 낮고 넓으며 밑창이 푹신해 신기에 편안한 신발) 브랜드 ‘젤플렉스’도 10억 원 규모에서 지난해 70억 원을 기록했다. 올해는 100억 원 정도를 예상할 만큼 시장의 반응이 뜨겁다.

신규 브랜드 론칭도 새로운 성장 동력이다. 그중 하나가 100% 맞춤 제작형 남성 고급 수제화다. “아무리 외국 브랜드가 인기라고 하더라도 50년 넘게 신발만 만든 장인이 직접 만든 구두가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게 조 사장의 판단이다. 까다로운 입맛을 지닌 남성 VIP 고객 수요를 잡기 위한 전략이다.

에스콰이아의 사례에서 보듯 시장 관계자들은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의 정착이 국내 구두 산업 부활의 열쇠라고 말한다. 대량생산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동반할 수밖에 없어 재고가 쌓이면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장의 변화에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살롱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다양한 콘셉트를 가진 브랜드별 차별화가 절대 조건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