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이명박 대통령이 11월 10일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던 중 다소 이례적인 일정을 가져 눈길을 끌었다. 하루 10개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기 바쁜 가운데 마하티르 빈 모하맛 전 말레이시아 총리를 만난 것이다.이 대통령은 당초 2박 3일간의 말레이시아 방문 일정을 잡았다가 1박 2일로 줄이면서 참모들이 마하티르 전 총리 면담을 취소했다. 그렇지만 이 대통령은 “꼭 만나야 한다”고 해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두 사람이 반갑게 마주 앉았다.
이 대통령이 왜 이렇게 마하티르 전 총리를 챙겼을까. 이 대통령은 마하티르 전 총리를 ‘말레이시아의 보석’이라며 평소 존경해 왔다.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투철한 사명감과 강한 신념, 멈출 줄 모르는 추진력, 여기에 예리한 통찰력까지 갖춘 마하티르 전 총리를 나는 미래 정치인의 한 표본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고 했을 정도다. 두 사람은 30여 년간에 걸쳐 우정을 다져 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난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통령은 당시 현대건설 대표였으며 말레이시아에서 케냐르 댐을 건설하고 있었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페낭대교 수주전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과 마하티르의 첫 만남은 건설 업체 대표로 고위 관료 및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는 ‘업무의 일환’이었다.
마하티르는 부총리로 실권이 전혀 없는 들러리에 불과했다고 이 대통령은 회고했다. 마하티르는 행정부의 2인자였지만 들러리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신화는 없다’에서 “마하티르는 그의 집무실에서 늘 혼자 앉아 있었다. 프랑스와 일본, 우리가 페낭대교 수주를 위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는데 일본의 마루베니사가 부패한 정권을 구워삶고 있어서 막상 나는 만날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마하티르 전 총리는 자신을 찾아온 이 대통령에게 “나는 당신을 도울 능력이 없다. 그런데 왜 자꾸 찾아오는가”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본사에 돌아가면 누구를 만났다고 해야 하는데 부총리를 만났다고 하면 실권자와 접촉한 것으로 알 것 아니냐”고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마하티르 전 총리는 웃으면서 “그렇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한국 얘기나 좀 들려 줬으면 한다”고 화답했다. 이후 두 사람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충고도 하는 가까운 사이가 됐다. 경제 발전을 통해 가난을 해결하자는데 의기투합했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특히 새마을운동을 주목했다.
“도울 능력이 없는데 왜 자꾸 찾아오는가”
그런데 페낭대교 낙찰 직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후세인 온 총리가 사망하면서 마하티르 전 총리가 급작스럽게 권좌에 오르게 됐고 결국 현대건설이 페낭대교 건설 입찰을 따냈다.
이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인간관계는 국가적인 이익이 우선하는 냉엄한 관계지만 그런 속에서도 인간적 교감을 통해 변하지 않는 우정이 싹트기도 한다. 마하티르 전 총리와 나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술회했다.
이 대통령이 마하티르 전 총리로부터 배운 것이 또 하나 있다. 이 대통령은 당시 페낭대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마하티르 전 총리를 위해 단을 높게 하고 커다란 의자를 배치했다. 그런데 마하티르의 비서실장은 “총리가 앉는 자리는 그늘이 있는데 5000명이 참석하는 이 앞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라면서 총리가 앉는 자리에 차양을 없애 주도록 요구했다.
또 커다란 의자를 보고 “총리가 다른 사람보다 엉덩이가 큽니까”라며 다른 사람들이 앉는 의자와 똑같은 것을 갖다 놓으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충격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이때의 일을 교훈 삼아 대통령 취임 직후 자신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 귀빈석을 단상 위가 아닌 단상 아래에 마련하도록 했다.
이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때 초야에 묻힌 마하티르 전 총리를 초청했고 마하티르도 병석에 있었지만 흔쾌히 응하는 등 두 사람은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홍영식 한국경제 정치부 기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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