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부 장관이 보는 전세난
“전세금 3000만 원 올려주세요.”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이모(42) 씨는 신도림동 전셋집 2억4000만 원의 계약 만기를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3000만 원 올리겠다고 11월에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이 씨는 물가도 오르고 아이들 학원비 대기도 힘든 판인데 도저히 3000만 원을 마련할 형편이 안 되자 집을 줄여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로 마음먹었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수도권을 비롯해 일부 지역의 전셋값이 치솟으면서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아 서민들의 한숨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그런데 귀를 의심할 엉뚱한 소리가 들려 왔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시작되는 지난 1일의 일이다.
“전셋값이 일부 강세를 보이는 것은 집을 살 시기냐 아니냐를 판단해야 하는 시장 상황에서 실수요자의 매매 대기 수요가 전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시장이 안정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크게 우려할 일이 아니다.”(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전셋값 상승세, 멈출 기미 안 보여
부동산 정책을 다루는 주무 부서인 국토부 장관이 이런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솔직히 현실을 보는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것이어서 ‘설마’하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 장관은 12월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오피니언 리더스클럽(OLC) 경제 기자회 초청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세나 월세는 주로 돈 없는 서민들이 사는 주거 방식이다. 그런데 장관이 한가하게 전셋값 상승은 우려할 일이 아니라니…. 전셋값이 1억∼2억 원씩 오른 일부 강남의 아파트 단지는 제외하더라도 강북이나 용인 등지에서도 수천만 원씩 올랐다.
전셋값이 수천만 원은커녕 수백만 원만 올라도 버티기 힘든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오르는 전셋값을 내지 못해 2년 동안 살던 집을 내주고 집을 줄이거나 직장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 떠나곤 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정 장관의 실언으로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 장관은 또 “전세난 해소 차원에서 도심 1~2인 가구와 소형 주택을 늘리려고 도시형 생활주택과 준주택을 확대하는 쪽으로 정책을 펴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셋값이 오르고 있지만 정부로서는 할 일을 다했다는 변명처럼 들린다.
국토부는 연초에 올해 2만 가구의 도시형 생활주택을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도시형 생활주택이 뭔가. 바로 원룸형(12~30㎡)이나 기숙사형(7~20㎡) 등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1인당 주거 면적(2005년 22.9㎡)에도 못 미치는 주택이다. 정부가 서민들을 ‘쪽방’ 수준 크기의 집에다 죄다 몰아넣을 생각인지 묻고 싶다.
정 장관의 말과 달리 전세 문제는 ‘우려’도 아닌 ‘심각’ 수준이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전국 전셋값은 2009년 3월 이후 올 11월까지 21개월 연속 올랐다. 11월에는 전달보다 1.0% 올랐으며 서울(0.8%)보다 광역시(1.1%)와 기타 지방(1.0%)의 상승 폭이 컸다. 주택 규모별로는 대형(0.8%)보다 서민들이 주로 사는 중형(1.2%)과 소형(1.0%) 주택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정 장관은 강연 말미에 “정치에는 뜻이 없으며 재임 중 최선을 다한 뒤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후배들을 가르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2월부터 국토해양부 수장을 맡고 있는 국토부(옛 건설교통부 포함) 최장수 장관이다.
김문권 편집위원 m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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