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위 도요타자동차

도요타자동차는 두말할 필요 없는 일본 최대 기업이자 간판스타다. 2008년 경쟁사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생산(855만 대)과 판매(891만 대) 모두 세계 ‘넘버원’ 자리에 올랐다. 그해 매출액(26조2892억 엔)과 순이익(1조7178억 엔)은 사상 최대치로 기록됐다.

다만 이듬해인 2009년엔 금융 위기 탓에 사상 최초의 적자(개별재무제표기준)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엔 미국의 대량 리콜 사태가 또 발목을 잡았다. 도요타 쇼크였다. 모두 1240만 대가 리콜 대상에 오르는 등 위기 사태에 직면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상당 부분 극복한 모습이다. 여전히 글로벌 넘버원의 왕좌도 고수 중이다. 2009년 취임한 창업자의 4세손인 도요타 아키오 사장을 중심으로 위기 극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도요타는 독특한 경영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도요타 생산방식(TPS)이다. 재고를 줄이기 위한 간판(看板) 방식은 물론 낭비 절감의 JIT(Just in Time:적기 적량 생산) 시스템과 현장 단위의 혁신 활동을 뜻하는 가이젠(改善) 등은 원조가 모두 도요타다.

은행 융자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자본 중시(무차입) 경영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도요타 생산방식은 한계도 있다. 2010년 초 리콜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치게 효율이 강조돼 근로자의 각종 부담 증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대량 주문이 낳은 리콜 사태 이후 품질 유지를 위해 스피드 경영을 포기하기도 했다. 제품 개발, 시장 장악이 좀 늦어도 품질이 기본이란 생각에 확실한 것만 내보내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2010 한중일 100대 기업] 위기 탈출 성공…‘품질 우선’ 재가동
창업자는 일본의 발명왕으로 불리는 도요타 사키치와 장남 도요타 기이치로다. 부친이 자동직기 발명에 생애를 걸었다면 여기에 영향을 받은 아들은 1937년 도요타자동차공업을 창업한 자동차 산업의 개척자다.

도요타의 현장주의는 초등학력으로 100여 건 이상의 특허·실용신안을 보유한 부친으로부터 비롯된다. “자동차를 만들라”는 부친의 뜻을 일찍부터 물려받은 아들은 도쿄대 졸업 후 부친 회사에 입사하며 본격적인 미션 실천에 착수했다.

부자 간 협조 시스템은 일사불란한 노사 협조 팀워크와 일가 중심의 막강한 단결력으로 연결됐다. 1938년엔 일본 최초의 자동차 일관 제조 공장을 준공했다. JIT 시스템은 이때부터 도입됐다.

차세대 전기자동차 ‘승부수’

이후 전시 체제엔 승용차 국산화는 잠시 뒤로 밀려났고 군용 트럭 생산에 매진했다. 다만 전쟁 이후 수요 격감, 자금 악화로 한때 존폐 위기에 내몰리지만 6·25전쟁을 특수로 삼아 극적으로 회생했다.

자체 기술로 대중 차량을 제조한다는 도요타의 경영전략은 이후 코로나(1957년)·카롤라(1966년) 개발·판매로 이어지며 성공 신화를 써갔다. 더욱이 카롤라는 1974년 단일 차종으로 세계 최대의 판매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1989년 내놓은 고급 승용차 렉서스는 도요타가 세계무대를 장악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대형·고급 세단을 지향한 렉서스는 ‘일본차=소형차’의 이미지를 깨버린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 벤츠·BMW·캐딜락 등 서구 자동차를 능가하는 품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엔 2005년 발매됐다.

위기 극복은 현재 진행형이다. 가령 올해 북미 시장점유율(1~10월)은 전년 대비 1.5% 떨어진 15.2%를 기록해 12년 만에 하락세를 보였다. 경영 구조 등 근본 문제보다 기술 해결에 치중하는 근시안적 경향을 지적하는 이도 적지 않다.

남겨진 숙제도 많다. 도요타를 빙하기 때 공룡으로 비유한 닛케이비즈니스는 새로운 경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실패할 수 있다는 경계론을 최근 내놓았다. 엔고 공포가 대표적이다. 이를 피해 해외로 이전하면 그간 품질·신뢰를 지켜왔던 국내 계열사 재편 문제가 불거진다.

누미 공장 폐쇄 이후 주력 시장인 미국에서의 판로 축소도 해결 과제다. 중국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것도 어려운 과제다. 물론 승부수는 있다. 차세대 제품인 전기자동차가 대표적이다.

전영수 게이오대 경제학부 방문교수 change4drea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