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경쟁 구도와 한국 기업의 활로
한국은 지난 2009년에 밀어닥친 세계 경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수준이고 경상수지도 큰 폭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이번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국내 주력 산업들은 오히려 세계시장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무엇보다 반도체와 정보통신 산업 실적이 크게 개선됐다.
반도체 산업은 국내 업체들이 세계 전체 매출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가 됐다. 액정표시장치(LCD) 부문은 부동의 세계 1위를 차지했고 휴대전화도 세계 주요 시장에서 매출 1위 제품으로 부상했다. 자동차 산업 역시 북미 지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 시장에서 일본 제품을 제치고 크게 약진했다.
조선·철강과 같은 중화학공업 제품에 더해 반도체·휴대전화와 같은 정보기술(IT) 산업까지도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산업군으로 위상을 확고히 하고 국내 자동차 기업이 글로벌 주요 업체로 도약하게 된 것은 국내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다.
대반격 준비하는 일본 기업들
세계경제 위기가 지난 후에도 한국 경제의 승승장구는 이어질 것인가. 사실 장담하기 어렵다. 시장 여건은 국내 기업들이 편안히 선두 자리를 지켜 나가도록 내버려둘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국에 근접해 있는 일본·대만·중국 등 동북아 지역 경쟁국들의 추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성공 신화에 안주해 있으면 일본이나 대만 업체들의 반격과 중국의 추격에 몰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새로운 ‘샌드위치’ 상태에 빠져들 위험성이 항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과 대만 업체들은 잃어버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우리에게 밀린 일본이나 대만 업체들은 ‘패자의 역습’을 통한 권토중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기업들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 등을 통해 지금의 수치를 씻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또한 협공 전략도 펴고 있다. 반도체 부문에서는 일본과 대만 업체 간 전략적 제휴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LCD 분야에선 대만 업체들이 덩치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인수·합병(M&A) 등을 추진하고 있다.
더욱이 반도체 D램 부문에서는 세계 3위 업체인 일본 엘피다사가 대만 업체들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를 추격할 태세다. 이에 더해 후발 업체이자 한국 기업의 잠재적 최대 경쟁자인 중국 업체들 또한 경쟁력을 높이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거대한 내수 시장을 갖추고 있고 정부가 대대적인 정책 지원을 해주는 것이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글로벌 기업으로 부상하는 원동력이다.
중국은 이미 세계시장에서 점유율 1위 상품이 최고로 많은 수출 대국이다. 중국은 세계 수출 1위 품목이 2004년 830개에서 2008년 1200개로 늘어 독일과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세계 1위 품목 중 고기술 제품도 지난 2004년 50개에서 4년 만에 81개로 늘어났다. 이에 비해 한국의 수출 세계 1위 품목은 52개에 불과해 세계 19위 수준에 머물렀다.
동북아 경제의 경쟁 구도를 뒤바꿀 또 다른 여건 변화는 중국과 대만이 경제 통합을 이루는 차이완(Chiwan=China+Taiwan) 시대가 열리고 있는 점이다. 두 나라는 지난 2010년 6월 29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맺었다.
이는 상품과 서비스 무역, 투자 보장, 지식재산권 보호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경제 교류 협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양국 간 시장 개방이 확대되고 경제협력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급변하는 동북아 지역의 경쟁 구도 속에서 국내 업체들에 주어진 당면 과제는 힘겹게 쟁취한 선두 자리를 어떻게 고수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2등이나 3등의 자리에서 1등 기업을 추격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선진 기업의 노하우를 배우고 또 이들의 약점을 파헤쳐 보완하면 그런대로 시장점유율을 늘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등을 지켜나가는 일은 이전과 같은 모방과 개선만으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경쟁 기업들보다 더 높은 생산 효율성을 유지하고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신제품을 개발, 브랜드 이미지를 끊임없이 높여야 1등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다.
경제 위기를 거치며 확보한 세계 선두 기업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제 해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선진 기업들의 성장 과정에서 이미 제기됐던 정형화된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는 ‘추격형’ 방식에서 벗어나 급변하는 대내외 여건 속에서 스스로 문제를 찾고 이를 풀어나가는 ‘창조형’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이는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업 전략과 경영 시스템을 구축하는 ‘창조적 파괴와 혁신’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쟁자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고객과 시장의 변화와 흐름을 직접 몸으로 파악하고 여기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독창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국내 주력 산업들이 세계 최고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창조적 파괴와 혁신’ 전략을 추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한국 기업들의 R&D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영국이 발표한 ‘세계 R&D 투자 1000대 기업’에 따르면 한국의 주력 산업별 1등 기업은 미국·유럽연합(EU)·일본의 1등 기업에 비해 혁신 능력이 크게 뒤떨어져 있다.
한 예로 전자 정보통신 산업을 보면 한국 1등 기업인 삼성전자의 2008년 R&D 투자 규모는 미국 1등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의 5분의 3 수준, EU 1등 기업인 노키아의 4분의 3 수준이다. 한국 1등 기업의 매출액 대비 R&D인 R&D집중도는 5.8%로 마이크로소프트의 15.4%, 노키아의 10.5%보다 훨씬 낮다. 동북아 지역 협력과 공존도 필요
자동차 산업은 더 심하다. 한국 1등 기업인 현대자동차의 R&D 투자 규모는 일본 1등 기업 도요타자동차의 6분의 1 수준, 미국 1등 기업 제너럴모터스(GM)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며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선진국 기업들의 R&D 투자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중·장기 R&D 투자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하루빨리 국내 기업에 기술 경영 체제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R&D를 비용이 아닌 미래 수익 창출 투자로 인식하고 이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기업 오너의 연구·개발 리더십과 혁신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가 어우러질 때 투자 성과가 높아진다. 정부는 기업들의 R&D 투자를 늘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우수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국내외 대학이나 연구 기관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일뿐만 아니라 산업 현장에 있는 근로자들의 재교육 등을 통해 기업에 필요한 창조적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이들의 창조적 도전을 부추기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 정신과 기업 문화도 길러야 한다.
중국·일본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차이완 등으로 인한 관세 차별과 같은 경쟁력 약화 요인도 상쇄해야 한다. 차이완이 중국 사회주의와 대만의 자본주의와 결합한 ‘제2의 국공합작’이라는 점을 교훈 삼아 남북한 경제 협력 방안도 다시금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을 결합하는 남북한 경제 공동체는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동북아 지역의 막대한 개발 수요를 확보하는데 기여해 차이완이 주는 부정적 영향을 상쇄해 줄 수 있다.
일본 경제가 잘나갈 때 나타났던 일본 기업들의 ‘일본병’ 역시 경계해야 한다. 일본 기업들이 지녔던 ‘자만심’, ‘폐쇄성’, ‘경직성’이 산업 고도화 과정에서 일본의 지속 발전을 가로막는 함정들이었다.
일본 제조업이 세계시장을 주도할 때 일본은 자신들이 최고라는 자만심에 도취됐다. 자만심은 곧 일본 가치와 생산방식만을 고집하는 폐쇄성의 늪에 빠지게 했다. 이는 바로 시장과 소비자 기호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유연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 기업의 고민은 20세기 산업 시대의 것과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1960년생. 82년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98년 성균관대 경제학박사. 2003년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현). 2007년 국민경제자문회의 전문위원(현). 2010년 한국생산성학회 부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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