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장하준(47)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한국 경제 진단은 늘 일관된 관점을 갖고 있다. 거칠게 정리하면 외환 위기에 따른 구제금융 조건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 부과한 구조조정 정책의 결과로 기업은 부채비율을 강요당하고 정부는 재정긴축이라는 틀에 갇히면서 성장 잠재력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어설픈 선진국 따라 하기보다는 과거 우리가 해왔던 정부 개입적 산업 정책을 통해 한 단계 더 도약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 시장주의라는 이름만 그럴싸한 경제정책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이는 최근 장하준 교수가 펴낸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에서 단 몇 주 만에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며 화제를 이어가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장하준 교수를 만나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창간 15주년 특별 인터뷰 (3)] “감세보다 잘 거둬 잘 쓰는 게 중요”
집권 중반을 넘어선 이명박 정부가 표방해 온 경제정책의 성격을 포괄적으로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길게 보면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 집권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선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와 다르다고 하지만 저는 같은 틀 내에서 좀더 부자 편을 드는 정도라고 봐요. 한미 FTA라든가 자본시장 개방 문제를 봐도 그렇고 세계금융 위기 때문에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동북아 금융 허브론을 봐도 그렇습니다.

집권 초기에 MB 물가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강만수 전 장관 같은 이는 지나친 환율 관리 때문에 논란을 빚기도 했지요. 경제를 트레이드마크로 당선된 대통령인데 단기 지표 관리에만 몰두해 온 것은 아닌지, 또 과연 MB표 경제정책이라는 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 노선은 ‘규제를 완화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 주면 잘될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가 출신 대통령 치고는 안이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사실 대기업들이 얼마나 장기 계획을 세워서 사업을 합니까.

대기업 최고경영자 중에서 ‘나는 시장주의자이니까 경영계획 없이 시장에 맡기겠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처음에는 이 대통령이 기업가 출신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기업 경영하듯이 계획을 세워서 너무 조직적으로 밀어붙일지 몰라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아요.

이는 기업인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와도 전혀 걸맞지 않은 일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왜 기업인 출신 대통령을 뽑았는지 의심이 들 정도예요.

장 교수님은 물가 안정 위주의 통화정책에 대해 꾸준히 비판해 오셨죠. 하지만 한국 현실에서는 ‘물가 안정이 곧 서민 정책’이라는 뿌리 깊은 등식이 있습니다. 심지어 전두환 전 대통령조차도 ‘물가를 잡은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죠. 서민을 위한 물가정책을 포기하라는 말인가요.

물론 다른 조건이 다 똑같다면 물가가 안정되는 게 좋겠죠. 하지만 물가를 아주 낮추려면 경제활동을 억누를 수밖에 없거든요. 5~6% 수준의 인플레를 1~2%로 낮추려면 저성장 기조를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낮은 물가를 유지할 수 있다면 개인의 실질임금은 보호가 되겠죠. 그러나 일자리가 없어져 근로자들이 잘려나가고 새로운 일자리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는 피해가 되돌아온다는 겁니다.

문제는 물가가 내려가면 실질임금 증가로 혜택을 보는 사람이 대부분 국민이지만 저성장 때문에 청년 실업자들이 발생한다고 해도 (물가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소수라는데 문제가 있는 거죠.

직장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의 실질임금 몇 %를 보호해 주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그것을 보호해 주지 않더라도 청년 실업자 수십만 명을 살리는 게 옳으냐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죠.

선거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서 (장기적 이득이라는 명분으로)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소수의 이득을 보장하기 위해 경제정책을 편다는 게 가능합니까.

표만 생각해서 정책을 펼치면 안 되죠. 전체적으로 보아 어떨 때는 소수를 보호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고요.
[창간 15주년 특별 인터뷰 (3)] “감세보다 잘 거둬 잘 쓰는 게 중요”
산업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과거 정부들도 전략 산업 육성이나 미래 신성장 동력 발굴 같은 식으로 정부의 역할을 표방하고 나왔습니다. 별 효과가 없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과거에는 정부가 ‘밀겠다’고 하면 확실히 밀었는데 최근 그런 전략 산업 육성론은 말잔치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녹색 성장도 그래요. 대체에너지 분야만 예를 들어 보지요. 중국은 이미 태양열발전 분야에서 주요 수출국으로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방정부가 적극적으로 관련 산업 지원에 나선 결과예요. 핀란드의 노키아 같은 회사도 처음에는 정부 조달 시장에서 독점권을 주다시피 해서 오늘날의 초일류 기업이 된 겁니다.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 이른바 친기업 정책을 펼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투자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과거 정부와 달라진 점이 보입니까.

우선 이명박 정부의 상황 진단부터 잘못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기업들은 규제 때문에 투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990년대에 한국에서 공장을 하나 열려면 최고 300개에 가까운 인·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결과를 놓고 보면 8~9%씩 성장해 왔거든요. 기업가들은 돈 벌 기회가 있으면 규제를 참아내면서 사업을 합니다.

그러면 기업들이 투자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자유화되면서 단기주의 경영에 대한 압력이 커졌다는 겁니다. 10~15년 앞을 내다보기보다는 고작해야 3년 정도 내다보고 경영 계획을 세우는 방식이 주류가 되는 거예요. 투자라는 게 금방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기 실적주의 경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길은 투자하지 않는 겁니다.

기업가들은 사업해 볼만한 아이템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중국과 같은 경쟁국들이 등장하면서 결국 기술력으로 살아남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단기주의 경영이 계속되니까 더더욱 연구·개발에 투자하지 않는 겁니다. 연구·개발 투자는 다른 어떤 투자보다 (투자 회수 기간이) 오래 걸리는 분야 아닙니까.

게다가 젊은이들이 의사나 변호사 같은 (고용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직업만 선호하다 보니 정작 경제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의 질도 떨어지는 겁니다. 빨리 노동시장 분위기를 바꿔서 젊은이들이 연구·개발 쪽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연구·개발 투자에 나서줘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연구·개발 재원 조달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20% 안팎으로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미국도 이 수치가 40%는 됩니다.

중소기업에 초점을 맞춰볼까요. 우리 중소기업 정책은 대·중소기업 상생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공정거래 정책으로만 다뤄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기업에 붙어서 먹고사는데 좀더 후하게 다뤄주라는 식이죠. 이런 식으로 연구·개발에 집중 투자하는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싼 인건비로 경쟁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지 않습니까. 우리가 벤치마킹해야 할 나라들은 스위스·독일·이탈리아처럼 고급 기술로 특화된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들이에요.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들을 보면 중앙정부보다 지방정부의 역할이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방 정부·대학·금융권 등이 함께 힘을 모아 중소기업들을 육성하는 거죠.

(장하준 교수는 이처럼 국가 개입형 성장 정책에 관심이 많은 학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세금이라는 정책 수단을 통한 복지의 확대를 주장한다. 이를 위해 세금을 더 많이 거둬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도 주저하지 않는다. 흔히 성장이냐 복지냐를 놓고 양자택일의 문제로 접근해 온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창간 15주년 특별 인터뷰 (3)] “감세보다 잘 거둬 잘 쓰는 게 중요”
최근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자 감세’ 또는 ‘감세 철회’ 논쟁은 어떻게 보십니까.

부자들의 세금 깎아주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데에 별다른 증거가 없어요. 더구나 우리나라는 조세부담률이 (OECD 국가 중) 최하위에 속하는 나라입니다. 남미에 가도 우리나라보다 조세부담률이 높은 나라가 많아요.

영국도 1980년대에 그렇게 세금을 깎아주면서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는데 경제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세금을 깎아주는 게 능사라면 아프리카 빈곤국들 중 10%도 안 되는 세금을 내는 나라들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문제는 세금을 ‘없어지는 돈’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세금은 잘 거둬 잘 쓰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불문하고 경제 부처들이 내세우는 세제 정책의 기본은 ‘세원은 넓히고, 세율은 낮추겠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어느 정부도 우리 현실에서 ‘숨은 세금 찾아내겠다’는 이야기는 해도 ‘세금을 올리겠다’는 이야기는 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물론 지금처럼 짜여 있는 구도라면 불가능하겠죠. 세금이라는 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우선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출산 문제를 볼까요. 지금처럼 수입의 70~80%를 아이들을 기르는 데 갖다 바쳐야 하는 현실 때문에 저출산 문제가 지속되면 25~30년 후에는 (경제활동인구 충원을 위해) 우리 국민의 20% 정도는 외국 이민자로 채울 수밖에 없거든요.

여전히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노래처럼 부르고 사는데 과연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느냐는 것이죠. 심하게 비유하면 단일 민족을 포기하든지 세금을 더 내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서 복지 수요에 비해 현재 재원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이해시켜야지요.

복지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 등의 논란이 있습니다.

미국처럼 선별적 복지 정책을 통해 돈 좀 있는 사람에게 거둬서 가난한 사람 굶어 죽지 않도록 하는 방식도 물론 사회 안정에 도움은 됩니다. 영국이 현재 고소득자에게는 보육 수당을 삭감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선별적 복지의 일환이지요.

그러나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이보다는 스웨덴이나 핀란드처럼 복지 정책이 경제성장과 잘 연계되는 시스템입니다.

성장과 잘 연계된 복지란 어떤 개념입니까. 구체적 사례를 알려 주시죠.

파산법을 만든 이유는 망한 기업들에도 재기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현대적 의미의 파산법이 없었어요. 채권자들로부터 거의 보호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 개선 계획 같은 것도 아예 꿈꿀 수 없었죠.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전제 하에서는 행동이 과격해 질 수밖에 없어요. 복지제도가 취약한 미국에서는 자유무역을 통해 경쟁에 노출돼 해당 산업이 망하게 되면 그야말로 끝이니까 노조가 더욱 강력하게 저항하는 겁니다.

반면 스웨덴 같은 나라는 현재 직장을 잃어도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저항할 필요가 없는 거죠. 오히려 이런 나라들에서 구조조정이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실패해도 굶어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즉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게 바로 성장과 연계된 복지라는 말이죠.

결국 사회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과거 정부에서도 이를 여러 번 언급했지만 구체적 성과는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회 안전망을 이야기할 때 개념 정립부터 잘못된 면이 있었습니다. 떨어져도 죽지 않도록 받아준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다시 경제활동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다시 올려놓아 준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어야 하거든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복지’ 공약이 전면에 등장할 것이라는 정치권의 관측이 있습니다. 현 단계 한국 경제에서 복지 아젠다가 전면화할 가능성은 있다고 보십니까.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는 흔히 스웨덴을 발달된 복지국가의 모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1932년까지만 해도 소득세조차 거두지 않던 나라였습니다.

세금 내기 그렇게 싫어한다는 미국에서도 소득세는 1910년대에 이미 도입됐고 영국은 그보다 훨씬 전인 1842년부터 소득세를 거두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스웨덴은 소득세에 대한 반감이 워낙 강해 1932년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이 문제를 꺼내지도 못했던 거예요. 이렇게 보면 대선과 같은 중요한 계기가 복지 정책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될 수도 있지요.

약력 : 1963년 서울 출생. 1986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91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 1990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현). 1995년 유엔 무역개발기구(UNCTAD) 연구주임. 2003년 고려대 BK21 경제학 교환교수. 2003년 유럽 정치경제학회 뮈르달상 수상. 2005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주요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2004년)’, ‘쾌도난마 한국경제(2005년)’, ‘나쁜 사마리아인들(2004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010년)’.


케임브리지(영국) = 성기영 영국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