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원 선거 패배로 백기 든 일본 간 총리
일본 민주당의 간 나오토 정권이 소비세 인상의 구체안을 올해 안에 확정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 간사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소비세 인상과 관련, “당초 고려했던 (연내) 시한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간 총리가 연내 소비세 인상의 구체안을 확정하기로 했던 방침을 포기할 수 있다는 의미다.간 총리가 내건 ‘재정 재건을 위한 소비세 인상’이 7·11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민주당 참패의 빌미가 된 만큼 방침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에다노 간사장은 “소비세 문제는 이제 막 논의를 시작했을 뿐으로 소비세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고 유권자가 받아들이게 한 것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작년 8·30 총선 당시 차기 중의원 선거 때까지 향후 4년간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간 총리가 취임 후 이를 뒤집고 소비세 인상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당내에서는 총리가 당내 여론 수렴 절차도 없이 독주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함에 따라 소비세 인상은 당분간 물 건너갔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특히 중의원(하원)에선 ‘여대야소’이지만 참의원에서는 ‘여소야대’ 형태여서 정상적인 정책 추진이 어려운 상황이다. 야당이 참의원에서 발목을 잡으면 법률을 통한 정부·여당의 정책은 원천적으로 추진이 불가능하다. 지난해 자민당 정권 말기 참의원의 ‘여소야대’로 각종 법률 개정이 공전하는 ‘식물국회’가 재연될 수 있다.
◇ 섣부른 발언에 민심 이반 = 민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소비세 인상론’이었다. 간 총리는 6월 기자회견에서 예고도 없이 “현행 5%인 소비세를 10%로 올리는 걸 초당파적으로 논의하겠다”며 소비세 인상론에 불을 붙였다.
나라 빚이 국내총생산(GDP)의 200%에 달하는 등 선진국 중 최악인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선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지론을 공식화한 것. 야당인 자민당도 소비세 인상을 공약으로 내건 터여서 큰 부담 없이 얘기를 꺼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발언의 파장은 컸다. 민주당은 작년 8·30 총선(중의원 선거)에서 소비세 인상을 4년간 논의하지 않겠다고 공약했었다.
일본 국민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도 않고 불쑥 소비세 인상을 내놓은 간 총리에게 등을 돌렸다. 한 여론조사에선 소비세 인상에 대한 간 총리의 설명과 대응과 관련, ‘이해 못한다’가 63%로 ‘이해한다(21%)’를 압도했다.
“간 나오토 총리가 국민을 바보로 알고 있다. 작년 여름 중의원 선거 때 4년간 소비세를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가 1년도 안 돼 말을 바꾼 건 기만이다.” 도쿄의 세타가야구 다마가와에 사는 택시 운전사 사카모토 미치타가(57) 씨는 간 총리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민주당을 지지해 왔지만 지난번 참의원 선거에선 다른 당에 투표했다고 말했다. 적자 재정을 치유하자는 취지에서 내놓은 소비세 인상 공약이 국민적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 세제 개혁 논의 중단될 듯 = 민주당의 선거 참패 원인이 간 나오토 총리의 ‘소비세 인상 검토’ 발언에서 비롯된 만큼 당분간 소비세 인상 추진은 어렵게 됐다. 적자 재정 복원을 위한 세제 개혁 논의 자체가 중단될 위기다.
간 총리는 참의원 선거 개표 결과가 나온 7월 12일 새벽 기자회견에서 소비세와 관련, “이제 문제 제기를 시작한 것일 뿐”이라며 “초당파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싶다”고 밝혔다.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비세 인상 문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간 총리가 소비세 인상을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다. 우선 정부·여당 내에서조차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간 총리와 에다노 유키오 민주당 간사장, 센고쿠 요시토 관방장관 등은 소비세 인상을 주장한다. 그러나 당내 실력자인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와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 등은 반대다.
연립여당인 국민신당도 소비세 인상에 결사반대다. 민주당이 연립 파트너로 공을 들이고 있는 다함께당 역시 소비세 인상에 반대하고 있다. 제1야당인 자민당은 소비세 인상을 참의원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간 내각과 제휴할 가능성은 낮다. 자민당은 간 총리가 요구하는 ‘초당파적 논의’를 거부하고 있다. 소비세 인상의 전제로 자녀 수당 등 퍼주기 식 복지 정책을 포기하라고 주장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소비세 인상 검토가 벽에 부딪쳤다”며 “재정 재건을 위한 증세 등 세제 개혁 자체가 가시권에서 멀어진 분위기”라고 말했다.
◇ 식물국회 재연 우려 = 일본의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참의원에서 과반수 의석에 크게 못 미침에 따라 일본 정국은 오리무중 상태에 빠졌다. 취임 한 달여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대패함으로써 간 총리의 리더십은 급속히 약화될 전망이다.
아사히신문은 “여소야대로 참의원 운영이 어려워져 민주당 정권은 심각한 상황을 맞았다”고 최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간 총리가 소비세 인상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선거에 패배함으로써 9월의 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당내 대립이 격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요미우리신문은 “참의원 선거 참패에도 불구하고 간 총리가 사임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당 내부에서는 총리와 당 집행부의 책임론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민주당이 참의원 운영을 위해 야권을 상대로 연립 파트너를 찾고 있지만 향후 선거를 겨냥해 야당들이 연정 참여에 부정적”이라며 “국회 운영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 신문은 9월에 당 대표 경선에서 당내 최대 세력인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 그룹의 강력한 도전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마이니치신문은 “민주당의 패배로 자민당을 포함한 야권이 참의원의 과반수를 확보함으로써 ‘식물국회’ 가능성이 높다”며 “민주당의 정권 기반 약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 9월에 총리 바뀔 수도 =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리더십이 약화되면서 일본 정국도 소용돌이칠 전망이다. 참의원은 총리 선출과 예산안 확정 등을 제외하곤 대부분 법률 통과 때 거부권을 갖는다.
거부된 법안을 최종 확정하기 위해선 중의원에서 3분의 2 의석이 필요하지만 여당 의석은 여기에 못 미친다. 주요 정책을 위한 법안이 참의원에서 야당의 반대에 부딪치면 추진될 수 없다는 얘기다.
여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고 해서 정권이 당장 바뀌는 건 아니다. 정권 교체 여부는 중의원 선거로 결정된다. 간 총리도 선거 직후 “선거 패배와 관계없이 총리직은 계속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의원의 ‘여소야대’는 간 총리의 목을 조일 수 있다. 정책 추진력이 급속히 떨어지는 건 물론이다. 여기에 참의원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질 공산이 크다.
이 경우 자민당 식의 만성적 리더십 부재 상황을 맞을 수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도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을 놓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8개월여 만에 퇴진했었다.
간 총리를 기다리는 큰 고비는 9월로 예정된 민주당 대표 선거다. 대표 선거에서 간 총리가 떨어지면 총리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9월 민주당 대표 선거엔 지난 6월 하토야마 총리와 동반 퇴진했던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이 나설 가능성도 있다. 당내 최대 세력을 움직이고 있는 오자와 전 간사장이 참의원 선거 패배 책임론을 갖고 간 총리를 흔들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확실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툭하면 총리가 바뀌던 자민당 정권 말기 현상이 재연될 수 있다. 자민당도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뒤 총리가 1년에 한 번씩 바뀌는 등 흔들리다가 결국 정권을 내줬다.
차병석 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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