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MASOK 공동기획⑤ - 노익상 한국리서치 사장
노익상 한국리서치 사장에게 물었다. “마케팅에 무슨 비법이 있나요.” 35년 경력의 리서처이자 마케터인 노 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비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본은 있죠.”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게 뭔가요.” 노 사장이 기자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노 사장은 국내 리서치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32년 전 단돈 3만8000원과 직원 한 명으로 한국리서치를 설립했다. 한국리서치는 연매출 500억 원대, 200여 명의 정규 사원이 일하는 우리나라 굴지의 리서치 회사로 성장했다.
노련하고 실력 있는 베테랑 노 사장이 ‘사람’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품을 만드는 이도 사람이고, 상품을 파는 이도 사람이고, 상품을 사는 이도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마케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난해하다.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 노 사장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체험의 폭 크게 넓혀야
“가령 중국 쓰촨성에 휴대전화 마케팅을 하러 갔다고 칩시다. 먼저 그 지역 소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을 알아봐야지요.
몇 시에 일어나고,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그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상품을 구매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한편의 영화처럼 그릴 줄 아는 마케터가 훌륭한 마케터입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무슨 특별한 노하우라도 있는 것일까. 노 사장이 얘기하는 첫 번째 방법은 ‘체험’이다. 체험이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마케터나 리서처가 다뤄야 할 것이 눈에 보이는 제품이든 보이지 않는 서비스든 간에 자신이 먼저 사용해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어요. 직접 보고 냄새를 맡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어요.
아니, 시작해서도 안 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목에 걸리지 않는 연기’를 느낄 수 있으며, 맥주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이 ‘목욕 후 마시는 맥주 한잔의 맛’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체험은 한정적이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다. 더구나 시간도 부족하다. 노 사장은 직접 체험이 어려운 것은 간접 체험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과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사람들의 삶을 다뤘어요.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른 삶의 스타일과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다양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체험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체험도 중요하지만 마케터에게는 ‘통계’라는 훌륭한 무기가 있지 않은가. 노 사장은 “통계는 통계일 뿐, 그 속의 사람을 봐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예를 들어 A라는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데이터가 나왔다고 치죠. 그 데이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응답자가 좋아하는 이유를 알아야 해요. 그걸 알고 제품을 만들고 광고 전략도 세워야 합니다. 사람을 잃어버린 통계, 전략을 위한 통계는 실제 마케팅에서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브랜드의 의역(意譯)은 ‘신용’
노 사장은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언젠가 서울 외곽 도시에 백화점을 세우겠다는 한 대기업의 타당성 조사를 의뢰받았다고 한다. 상권의 구조, 타깃 고객의 특성, 기존 경쟁 백화점의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방법, 상품 구색 등이 조사 항목이었다.
연일 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보고회를 가졌다. 보고회가 끝나고 나서 백화점 사장이 “백화점 지을 자리에 가보셨습니까?”라고 넌지시 물었다. 노 사장은 그 질문에 “아찔했다”며 “현장에 가보지도 않고 숫자만 늘어놓는 것은 위험하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노 사장은 마케터는 ‘발상의 전환’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마케터들은 소비자들이 제품을 ‘선택하는 이유’보다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개 마케터들은 제품을 ‘선택하는 이유’에 집중하는데, ‘선택하는 이유’를 알면 기분은 좋지만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선택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엔 기업 이미지, 디자인, 품질 등 소비자의 답변이 두루뭉술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면 답변이 구체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남녀 관계에서도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야 반성하고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들라고 하면 답변이 구체적이에요. 예를 들어 휴대전화의 경우 ‘미끄럽다’거나 ‘영문 자간이 좁다’는 등의 지적이 많이 나옵니다. 그걸 개선하는 것이 제품의 품질을 높이고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빠른 길입니다.”
사람을 아는 것도, 발상의 전환이 자유로운 것도 마케터가 가져야 할 역량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용’이라고 노 사장은 강조했다. 노 사장은 “브랜드의 의역(意譯)은 ‘신용’”이라며 “마케터는 결국 신용을 얻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뢰는 기업의 영속성을 좌우하는 잣대와 같은 것이다. 소비자의 신뢰를 얻으면 전쟁터에서 백만 대군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한킴벌리나 풀무원 같은 회사가 대표적이다.
사람과 신뢰를 최우선시하는 노 사장다운 논리다. 한국리서치를 국내 굴지의 조사 회사로 키운 비결도 결국 노 사장의 ‘사람 경영’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갖고 기업을 경영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노 사장의 경영 철학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
돋보기│후배를 위한 Tip
“소설과 영화를 많이 봐라”
노익상 사장은 마케터가 소비자만 알아서는 ‘반쪽짜리’라고 지적했다. 기업 내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들의 고민이나 노력, 바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뛰어난 마케터가 되기 위해서는 기업내 사람들과 소비자의 성향을 함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노 사장의 첫 번째 주문이다. 아울러 “제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품의 특징을 보여주지 않고 감성적인 호소에만 의존하는 광고는 모두 제품 콘셉트가 없고 카피만 튈 뿐이라는 것. 팔려는 물건을 제대로 알아야 포장이 자연스럽고, 설득력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 사장은 “좋은 제품을 이기는 방법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그만큼의 가격을 더 받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체험’도 노 사장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중요한 팁(tip) 중 하나다. “소설과 영화를 많이 봐야 합니다. 사람들의 진짜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체험을 더 확대하고 깊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소설과 영화입니다.”
약력 : 1947년생. 66년 경기고 졸업. 71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73년 고려대 사회학 석사. 1978년 한국리서치 설립, 대표이사 사장(현). 2002년 고려대 사회학 박사. 2007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현). 2007년 한국장애인부모회 후원회 공동대표(현).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