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사상 최대 수익률’ 의 비밀

국민연금은 지난해 10.39%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1999년 이후 10년 만의 최고치다. 금액으로 따지면 26조 원이 넘는다. 연금 출범 이후 21년간 쌓은 누적 수익금의 4분의 1에 가까운 돈을 한 해에 벌어들인 셈이다.

기금 덩치도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2007년 200조 원을 넘어서더니 올해에는 300조 원 돌파가 예상된다. 운용 규모가 커질수록 금융시장에서 운신의 폭은 좁아진다. 과거처럼 높은 수익률을 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국민연금이 찾은 돌파구는 해외 투자다.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Special ReportⅠ] 위기 직후 저가 매수 ‘대박’…해외 투자 잰걸음
강남 신사역에서 영동호텔 방향으로 100m쯤 가면 그다지 특색 없는 10층 건물이 하나 나온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294조 원(2010년 4월 말)의 자금을 주무르는 지구상에서 네 번째로 큰 연·기금의 자산운용 헤드쿼터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여의도 증권가나 외국계 금융사가 밀집한 광화문에서 한참 벗어난 지역이니 그럴 만도 하다. 잘나가는 금융회사의 상징인 휘황찬란한 로비나 까다로운 보안 검색대도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다. 한때 극장으로 쓰였던 이 건물 4개 층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자리 잡고 있다.

운용본부가 이곳에 처음 둥지를 튼 것은 5년 전이다. 기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운용팀을 강화하기 위해 송파에 있는 연금공단 본사에서 아예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 후 연금 자산은 또다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사무실은 천문학적인 운용 자산 규모에 비하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나마 수시로 찾아오는 외국인 방문객들이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캘퍼스)을 제친 국민연금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난해 국민연금은 10.39%라는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수치로만 보면 1999년 12.8% 이후 10년 만에 최고치다. 하지만 김하영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대외협력팀장은 “사실상 1988년 국민연금 설립 이후 최고의 성적”이라고 말했다. 금리가 10%대로 고공행진을 하던 10년 전과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기금 규모도 그 사이 47조 원에서 278조 원으로 늘어 6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47조 원으로 낸 10% 수익률과 278조 원으로 낸 10% 수익률이 똑같은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지난해 국민연금이 기금 운용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은 26조 원을 웃돈다. 작년 5대 그룹 상장사의 전체 순이익 29조 원에 맞먹는 액수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거둔 사상 최대 수익률은 전년 마이너스 0.18%라는 저조한 실적에 뒤이어 나온 것이어서 더욱 돋보인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공포가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면서 국민연금은 2008년 주식에서만 42.87%의 손실을 봤다.

그나마 자산 비중이 큰 채권이 10.51%로 높은 수익률을 올려 가까스로 만회했다. 국민연금은 그해 28%의 손실을 기록한 캘퍼스나 마이너스 14%인 일본 공적연금(GPIF)에 견줘 선방했지만 ‘사상 첫 마이너스 수익률’이라는 여론의 십자포화에 시달려야 했다.

2008년은 국민연금에게 악몽의 한 해였다. 주가는 900선까지 자유낙하를 거듭했고 자고 나면 손실이 늘어났다. 연금 가입자들의 항의 전화가 매일 빗발쳤다. 하지만 이때 저가 매수한 주식들이 작년 일제히 올라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왔다.

국민연금은 금융 위기가 본격화된 2008년 9월부터 2009년 2월까지 국내 주식 8조 원어치를 사들였다가 주가가 오르자 매각해 차익을 두둑이 챙겼다.

국민연금이 금융 위기의 혼란 속에 과감하게 주식 매수에 나서자 ‘정부가 증시 방어에 또다시 국민연금을 동원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외국인의 매도 물량을 받아주는 바람막이 역할만 한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았다.

김 팀장은 “국민연금은 지출보다 수입이 많아 아직 투자 여력이 있다”며 “한국 경제에 대한 장기 투자의 관점에서 적절한 매수 시점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중기 목표 수익률은 6.7%
<YONHAP PHOTO-1189> British banking group HSBC's headquarters at Canary Wharf in London on March 1, 2009. HSBC has weathered the financial crisis better than many of its rivals, but the banking giant is still expected to announce it needs more capital when it unveils its annual results tomorrow. AFP PHOTO/Ben Stansall
/2009-03-01 23:34:58/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British banking group HSBC's headquarters at Canary Wharf in London on March 1, 2009. HSBC has weathered the financial crisis better than many of its rivals, but the banking giant is still expected to announce it needs more capital when it unveils its annual results tomorrow. AFP PHOTO/Ben Stansall /2009-03-01 23:34:58/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런 판단은 적중했다. 2009년 주식과 채권의 수익률은 2008년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채권은 4.02%로 상대적으로 저조한 반면 주식은 45.4%로 대반전에 성공했다.

특히 국내 주식 수익률은 무려 58.65%를 기록했다. 벤치마크지수인 코스피 상승률을 6.61% 앞지른 뛰어난 성과다.

막상 국민연금은 지난해 거둔 사상 최대 수익률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칭찬이 언제 비난의 화살로 돌변해 날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눈앞의 1년짜리 성과보다 최소 3~5년의 긴 시각에서 평가해 달라고 주문한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현재 포트폴리오는 이론적으로 6~7년에 한 번은 마이너스 수익률이 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주식시장의 변동률은 대략 24% 수준이다. 기대수익률을 9%로 잡으면 마이너스 15~33%까지 수익률 편차가 벌어진다. 어느 해에는 마이너스 15%까지 수익률이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관계자는 “국내 시장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10%가 넘는다”며 “이걸 믿고 가면 몇 년에 걸쳐 원하는 기대 수익률이 나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론은 당장의 손실을 눈감아 주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지난해 기록한 10%대 수익률을 또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국민연금이 ‘2011~2015년 중기자산배분’에서 설정한 2015년 목표 수익률은 이보다 훨씬 낮은 6.7%다.

국민연금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식 30% 이상’, ‘채권 60% 미만’, ‘대체 투자 10% 이상’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계획이다. 국민연금은 내부적으로 좀더 구체적인 목표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지만 시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이를 공개하지 않는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에만 39조 원을 투자하고 있는 ‘큰손’이다. 국민연금이 어떤 종목을 사고파는지는 항상 주식시장의 최고 관심사다. 취재진이 촬영을 위해 증권운용실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기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칫하면 거래 종목이 누설될 수 있다는 예민한 반응이다.

채권시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채권 발행시장에서 국민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8~20%에 달한다. 안정성을 추구하다 보니 기금의 상당 부분을 국내 채권(72.9%)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투자를 늘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규모가 더 커지면 채권을 팔고 싶어도 받아 줄 곳이 없어 팔지 못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

국민연금의 기본 전략은 주식은 늘리고 채권은 줄인다는 것이다. 주식의 경우 현재 18%인 투자 비중을 2015년 3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기금 규모를 고려하면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는 향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현 상태라면 2015년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액은 국내외를 합쳐 최소 150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현재 55조 원(해외 주식 포함)에서 3배 가까이 늘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덩치가 커질수록 국민연금의 운신 폭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국민연금이 살 수 있는 종목은 한정돼 있다. 국민연금은 이미 포스코와 KT의 최대주주이며 5% 이상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도 71개사(2009년 9월 말)나 된다.

국민연금은 ‘5% 룰’에 따라 5% 이상 지분을 신규 취득하거나 이들 종목에 1% 이상 지분 변동이 있을 경우 이를 매 분기 공시해야 한다. 지분율이 더 늘어나면 공시 의무는 훨씬 엄격해진다.

10% 이상 보유 종목은 단 한 주라도 거래 때마다 신고하도록 돼 있다. 국민연금의 거래 내역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시장 참여자들의 국민연금 추격 매매가 훨씬 쉬워진다.
<YONHAP PHOTO-1189> British banking group HSBC's headquarters at Canary Wharf in London on March 1, 2009. HSBC has weathered the financial crisis better than many of its rivals, but the banking giant is still expected to announce it needs more capital when it unveils its annual results tomorrow. AFP PHOTO/Ben Stansall
/2009-03-01 23: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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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banking group HSBC's headquarters at Canary Wharf in London on March 1, 2009. HSBC has weathered the financial crisis better than many of its rivals, but the banking giant is still expected to announce it needs more capital when it unveils its annual results tomorrow. AFP PHOTO/Ben Stansall /2009-03-01 23:34:58/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보유 종목의 지분율이 높아질 경우 의결권 행사를 둘러싼 갈등도 우려된다. 지난해 ‘유엔 책임투자원칙(PRI)’에 가입한 국민연금은 환경과 사회, 지배 구조를 잣대로 의결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지분율 상승과 적극적인 주주 발언, 그리고 경영권 ‘간섭’에 대한 기업의 알레르기 반응이 맞물리면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기금 규모가 2469조 원으로 정점을 찍는 2043년 이후 벌어질 혼란이다. 이때부터는 가입자들에게 지급하는 보험 급여가 보험료 수입을 초과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보험 급여를 주기 위해 들고 있던 보유 자산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박경석 서강대 교수는 “기금 적립기에는 상대적으로 문제가 덜하다”며 “하지만 국민연금이 금융자산을 처분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팔아야 하는 자산 규모는 첫해인 2044년 5조 원을 시작으로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과연 수조 원어치의 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박 교수가 제안하는 해법은 국민연금의 분할이다. 덩치가 커진 국민연금을 여러 개로 쪼개 부작용을 줄이자는 아이디어다. 국민연금을 나눠 기금운용위원회를 각각 따로 두면 자산 배분의 실패에서 오는 위험을 낮출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연·기금의 투자수익률을 결정하는 것은 종목 선택이 아니라 자산 배분 전략이다. 주식과 채권, 대체 투자 등에 어떤 비중으로 투자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느냐가 90% 이상 수익률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현재 구조에서는 국민연금의 자산 배분이 잘못될 경우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해외 사무소 연내 추진 중

이재현 국민연금공단 국민연금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러한 분할론에 회의적이다. 그는 “분할 효과가 나타나려면 각 운용 기관 사이에 담합이나 군집 행동이 없어야 한다”며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일”이라고 말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연금 분할을 추진한 스웨덴이 좋은 사례다. 스웨덴은 ‘연금 비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연금(AP)을 AP1~4까지 4개로 나눴지만 연구 결과 각 펀드마다 자산 배분에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위원은 “분할의 이득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스웨덴 내에서 다시 합치자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안은 해외 투자의 확대다. 국내 저축을 국내 자원 배분에 활용하지 못하고 해외로 돌린다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해외 투자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원종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채권과 주식은 어느 정도 포화 상태”라며 “해외 투자를 어떻게 현명하게 하느냐가 앞으로 핵심 과제”라고 말했다.

해외 투자는 매매로 인한 시장 충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2043년 이후 예상되는 대량 매도 물량도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다. 원 연구원은 “기금이 늘어나는 속도를 고려하면 해외시장 진출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도 해외 투자 확대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4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은 해외 주식과 채권에 28조5000억 원을 투자하고 있다. 작년 말에는 전담팀을 꾸려 해외 주식에 대한 직접투자에도 뛰어들었다. 부동산 등 해외 대체 투자는 이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영국 런던 소재 HSBC 본사 건물과 2개의 오피스 빌딩, 호주 시드니의 오로라플레이스, 일본 도쿄의 KDX 그랜드스퀘어 빌딩 등을 공격적으로 사들였다.

올 들어서도 런던 개트윅공항의 지분 12%를 1800억 원에 인수한데 이어 독일 베를린의 관광 명소인 소니센터를 8500억 원에 매입했다.

해외 투자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정보와 경험의 부족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국민연금은 연내 해외 사무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뉴욕과 런던이 그 첫 번째 후보지다. 본격적인 해외 진출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김 팀장은 “운용 수익률을 1% 끌어올리면 2060년으로 예상되는 기금 고갈 시점을 9년 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