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30년간 한결같은 스피치 파트너
30여 년간 한결같은 스피치 파트너였던 아버지는 내 인생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었고 언제나 들을 만한 말을 해 줬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푸른 눈길을 걸어가는 나그네’라는 시를 읽다가 갑자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왜 시인은 하얀 눈을 푸르다고 했을까? 아는 사람?” 그때 나는 겁 없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눈이 너무 하얗다 못해 시리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훌륭해, 미경이는 감수성이 정말 뛰어나구나!”

그날 나는 집에 가자마자 부모님 앞에서 ‘오늘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한 수 더 떴다. “그랴, 난 우리 미경이가 그럴 줄 알았어.

넌 어렸을 때부터 말을 진짜 잘했다니까.” 아버지의 칭찬에 으쓱해진 나는 그날 밤부터 선생님이 질문하면 또 어떤 독창적인 답변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해 줄까 신나게 연구했다.

“아버지, 나 오늘 달리기 전교 1등 하는 민수만 죽자고 쫓아가서 2등 했어요.” “그려? 갸 아버지도 국민학교 다닐 적에 만날 1등 했는디 부전자전인갑다. 나도 갸한테 져서 만날 2등 했는디.(웃음)”

어린 시절, 날이면 날마다 우리 부녀는 낄낄거리면서 신나게 수다를 떨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엉뚱한 얘기를 하거나 이상한 질문을 해도 한 번도 야단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창 피아노 학원을 할 때,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하곤 했다. 건반을 장작 패듯 두들기는 애를 2년 꼬박 가르쳐서 간신히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게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다음날 아이가 와서 “엄마가 오늘까지만 치고 끊으래요”라면서 가버려 눈물을 쏙 뺀 적이 있었다. 아이 엄마가 케이크라도 하나 사들고 와 ‘죄송하지만 이러저러해서 이제 그만 보내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아이들에게 나는 스승도 무엇도 아니었다.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처음으로 음악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때 아버지가 전화로 두 시간 동안 그 엄마 욕을 진탕 해줬다. 눈물이 나다가도 아버지와 통화하기만 하면 어느새 웃고 있었다. 잘나가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강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명쾌한 답을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 저 학원 그만두고 강사 하려고요.” “네 남편은 뭐라디?” “그냥 학원이나 계속 하라던데요.” “그 녀석은 너랑 산 지 몇 년 안 돼서 널 몰러. 넌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도 잘 쳤지만 말을 더 잘했어. 네 언니는 운동회 갔다 와서 5분 얘기하는데 너는 50분씩 얘기하더라니까.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당장 학원 때려치우고 강사 시작해!”

아버지는 내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왜?”라고 묻지 않았다. 매일같이 대화하면서 그동안 내가 피아노 학원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한결같은 스피치 파트너였던 아버지는 내 인생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었고 언제나 들을 만한 말을 해 줬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세상을 향해 겁 없이 도전할 수 있었다.

아트스피치연구원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원장님, 어떻게 하면 우리 애를 말 잘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요?” 그때마다 나는 이런 조언을 하곤 한다. “본인이 직접 아이들의 ‘스피치 파트너’가 돼 주세요.”

어렸을 때부터 말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스피치 학원부터 보낼 일이 아니다. 가까운 곳에 멘토가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이 존경하고 따라할만한 스피치 롤모델이라면 가장 완벽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스피치 파트너’라도 돼줘야 한다.

스피치 파트너가 있는 집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자신이 한 말을 부모가 칭찬하고, 자신의 말에 부모가 설득당하는 것을 수없이 체험해 본다. 그 때문에 사회에 나가서도 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신감 있게 도전할 수 있다.

사회에서 스피치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을 살펴보면 어느 날 갑자기 학원에서 키워진 게 아니다. 대부분 집안에서 이미 ‘예약’하고 나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최고의 스피치 파트너였던 아버지에게 늘 감사한다.

김미경 아트스피치연구원장

약력 :
연세대 작곡과 졸업.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에게 스피치를 강의하며 ‘아트 스피치’라는 분야를 개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