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MASOK 공동기획③ - 나진희 네오팜 마케팅&영업본부장(이사)

[마케팅 고수의 비밀노트] “소비자가 원하면 제품 콘셉트도 바꿔야”
나진희 네오팜 마케팅&영업본부장(이사)은 담배 제조회사 필립모리스 한국법인에서 마케터로 직장 생활을 시작해 한국법인 최초의 여성 부장이 됐다.

그 후 콘택트렌즈로 유명한 바슈롬코리아 마케팅 임원을 거쳐 지금은 네오팜에서 마케팅과 영업을 담당하고 있다. ‘열등감은 가장 확실한 모티베이터’라고 주장하는 나 본부장을 만났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노래했다. 나진희 네오팜 마케팅&영업본부장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열등감”이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열등감은 내 나이 40을 넘길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무슨 사연일까.

나 본부장은 외국계 기업 임원을 거쳐 국내 대기업 계열사인 네오팜의 영업과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다.

여성 임원이 드문 한국 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크게 성공한 경우다. 그런데도 그녀가 “열등감을 가졌다”고 토로하는 것은 “열등감이 가장 확실한 모티베이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1980년대 중반은 국내 대기업들이 대졸 여직원을 거의 뽑지 않았을 때다. 그녀가 외국계 기업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필립모리스는 세계적인 외국계 기업이었지만 하필이면 담배 회사였다. 당시만 해도 수입 담배가 터부시되던 시절이다. 주변의 눈초리가 따가울 수밖에 없었다.

외국계 담배회사서 ‘사회 첫발’

더구나 1987년 그녀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필립모리스 한국 법인의 동료는 지점장과 지점장의 운전사뿐이었다. 초년병 시절에 그녀가 맡은 일은 커피 심부름이었다. 하루 30잔에서 많게는 70잔까지 탔다고 한다. 당연히 열등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열등감에 항복하지는 않았다. 싸워서 이겨냈다. 어느 순간 이렇게 결심하면서부터다. “열등감을 동력 삼아 지내보면 어떨까. 좀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녀는 “내 인생의 불모지를 열등감과 함께 걷기로 마음먹고 나서 나는 그 감정과 친구가 됐다”고 고백했다.

마케팅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녀는 국내 마케터들과 공동으로 저술한 책에서 마케팅에 대해 “저마다의 동굴 속 열등감을 자극해 빛 아래로 끌어내는 작업이며, 그로써 새로운 것을 꿈꾸게 하는 모티베이터의 외침”이라고 적었다.

마음을 바꾼 그녀는 달라졌다. 봄 햇살 같은 행복감이 스며들었다. 커피 한잔에도 공을 들였다. 자주 오는 손님의 기호를 일일이 메모해 놓았다가 그들이 커피를 요청하기 전에 확인했다.

이처럼 사소한 일처리를 사소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꼼꼼하게 챙기고 완벽하게 처리했다. 회사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지점장은 그녀를 인사·홍보담당으로 발령 냈고, 곧이어 브랜드매니저의 임무를 맡겼다.

그녀가 맡은 브랜드는 버지니아슬림이다. 국내에서 최초로 선보인 가는 담배다. 원래 여성 전용 담배였다. 그렇지만 당시 수입 담배 시장은 ‘산 넘어 산’이었다. 외산 담배에 대한 인식이 워낙 좋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처럼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이러다 보니 ‘여성 전용 담배’라는 콘셉트로 한국에 론칭하는 것은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그래서 ‘성공한 남성이 피우는 담배’로 과감하게 바꿨다. 성공적이었다. 중년 남성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인기를 얻어갔다.

한걸음 더 나아가 버지니아슬림보다 더 얇은 버지니아슈퍼슬림을 내놨다. 그녀는 “건강이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여서 타르와 니코틴이 적은 담배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면서 “지금은 버지니아슬림이 필립모리스의 대표 브랜드가 됐다”고 자랑했다.

마케터의 적은 ‘포기’다

물론 여성 전용 담배를 남성을 위한 담배로 콘셉트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글로벌 기업들은 대개 BI(Brand Identity)에 조금만 어긋나도 용납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녀는 “본사 시각에서 보면 이단적 행동”이었다며 “한국 사정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허락을 얻어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버지니아슬림의 성공을 경험하면서 “BI를 철저히 지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소비자가 원한다면 과감하게 수정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녀는 “필립모리스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글로벌 기업의 시스템과 커뮤니케이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며 고마워했다.

그녀가 근무할 당시 필립모리스의 임원들은 영국·미국·러시아·레바논·필리핀·스위스 등 다국적 군단이었다. 하지만 조직 운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잘 짜인 시스템과 자율을 중시하는 조직 분위기 덕분이었다. 실패를 탓하지 않는 기업 문화도 인상적이었다. 팔리아멘트를 키우지 못했다고 해서 경영진은 그녀를 문책하지 않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브랜드 매니저들이 실패하고 적지 않은 비용을 허공에 날려도 나무라지 않았다.

뱌슈롬코리아에 잠시 근무했던 그녀는 2009년 국내 기업인 네오팜으로 자리를 옮겼다. 네오팜은 피부 관리 제품 전문 업체다. 아토피 등 민감성 피부 케어 제품과 병원용 기능성 화장품을 생산하고 있다. 그녀는 마케팅과 국내외 영업을 총괄하고 있다.

그녀는 노인용 보습제를 출시하는 등 영유아 제품에 국한됐던 사업 영역을 전 연령대로 확대했다. 최근엔 수출에도 힘을 쏟고 있다. 작은 기업이라도 세계시장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싸워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피부 케어 제품 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라는 지적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마케터는 시장이 포화 상태라고 하더라도 포기해서는 곤란하다”며 “빈틈을 찾아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소비자 자신이 모르고 있는 니즈를 찾아내 밖으로 끌어내는 마케터가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꿈을 물었다. 모범 답안이 나왔다. “제품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미국 시장에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어요. 세계시장에서 성공하고 싶어요. 벌써 (성공)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활짝 웃는 그녀의 입가에 자신감이 번졌다.
[마케팅 고수의 비밀노트] “소비자가 원하면 제품 콘셉트도 바꿔야”
나진희 이사는…

1964년생. 86년 고려대 영문과 졸업. 95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석사. 87년~2004년 필립모리스 근무(부장). 2004년 바슈롬코리아 마케팅 상무. 2009년 네오팜 영업&마케팅본부장(이사).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