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입가경’ 미국의 신문 전쟁
최근 미국에서는 신문 전쟁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대표 유력 일간지인 뉴욕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간 경쟁이 그것인데, 가시 돋친 설전(舌戰)에 이어 최근엔 두 회사 간 신경전이 ‘법정 분쟁’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이번 싸움은 미국 내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두 신문사가 뉴욕이라는 가장 큰 광고 시장을 두고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싸움에서 누가 최후의 승자로 남게 될지, 또 이들이 경쟁 과정에서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들고 나올지, 또 이 같은 아이디어들이 시장 판도를 어떻게 바꿔 놓게 될지가 관전 포인트다.
◇ 지재권 침해 논란 = 지난 6월 3일 NYT는 사내 변호사인 리처드 샘슨 명의로 WSJ에 공문을 보냈다. 최근 WSJ가 자사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했고 이를 중단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 편지였다.
앞서 WSJ는 5월 26일 신문에 ‘Not just Wall Street. Every Street’라는 문구를 사용해 전면 광고를 내보냈었다. WSJ가 단지 월가 사람들을 위한 경제 신문이 아니라 모두가 즐겨보는 일간 종합지라는 뜻의 일종의 이미지 광고다. 문제는 이 광고 문구가 NYT가 몇년 전부터 쓰고 있는 문구를 그대로 베꼈다는 사실이다. NYT는 편지에서 “귀사가 본사의 마케팅 아이디어에 대해 경의(admiration)를 보이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남이 쓰고 있는 광고 문구를 허락도 없이 사용한 것은 명백한 지식재산권 침해(infringement of intellectual rights)”라며 “3일 내에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NYT는 WSJ가 자신들이 오랫동안 써 온 광고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마치 WSJ를 지원하는 것처럼 WSJ가 교묘하게 독자들의 오해를 유발했다고 비난했다.
다음날 WSJ의 대응이 걸작이다. NYT의 광고 문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WSJ는 해당사의 경고를 간단하게 무시했다. WSJ는 마케팅 담당 수석 부사장인 제니퍼 젠 명의로 보낸 답장에서 “그런 문구를 사용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며 “귀사의 법적 조치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WSJ는 또 “우리가 보기엔 그 같은 광고가 효과가 있었고 귀사의 공분을 산 것은 보너스(bonus)라고 생각한다”고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덧붙였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소송을 걸려면 걸어 보라는 식의 시니컬한 대응이다.
NYT는 즉각적인 대응을 피하면서도 “지식재산권을 도용한 후 농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법적 조치가 이어질 수 있다고 시사했다. 미 언론들은 NYT가 WSJ의 명백한 도발에 대해 엄중 대응을 시사했기 때문에 WSJ가 다시 그 같은 광고를 계속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 WSJ, 파격적 가격 공세 = 사실 이번 싸움은 수성(守成)의 입장에 서 있는 NYT와 공성(攻城)의 입장에 선 WSJ 간의 ‘숙명의 한판’ 승부 선상에 있다.
지난 4월 26일 WSJ는 NYT를 겨냥해 뉴욕판 신문 ‘그레이터 뉴욕(Greater New York)’을 발간했다. 이 신문은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본지에 따라 붙는 16면짜리 별지다. 이를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WSJ는 NYT가 독점하고 있는 뉴욕 신문광고 시장을 주목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뉴욕 기사를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이를 위해 WSJ는 ‘그레이터 뉴욕’에 35명의 베테랑 기자를 배치, 뉴욕 지역의 정치·문화·경제 등 지역 기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WSJ의 모회사인 뉴스코프의 루퍼트 머독 회장은 지난 3월 뉴욕판 발간 계획을 밝히면서 “뉴욕의 한 일간지가 자존심과 명성에만 매달리다가 정작 지역 뉴스의 취재를 외면하고 있다”며 “WSJ 뉴욕판은 뉴욕만의 정치와 지역 비즈니스, 문화와 스포츠를 상세히 다룰 예정”이라고 말했다.
NYT가 전국지화하는 동안에 생긴 지역 뉴스의 공백을 별지로 다루고 본지는 심도 있는 경제 뉴스를 제공하면 뉴욕 시장에서 충분히 독자와 광고주들을 NYT로부터 빼앗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WSJ는 일단 가격 공세로 포문을 열었다. 이 신문은 NYT에서 본지로 신문을 바꾼 가정 독자들에게 한 달에 단돈 10달러를 받고 배달해 주고 있다. NYT의 40달러에 비해 4분의 1 가격이다.
NYT가 신규 독자에게 50% 할인 혜택을 주고 있지만 그래도 WSJ와의 가격 차가 두 배다. WSJ는 신규 온라인 독자들에게는 주당 2.29달러를 받고 있다(NYT는 내년 1월부터 인터넷 신문을 유료화할 계획이다).
광고주들에게도 NYT에 비해 훨씬 값싸게 지면을 팔고 있다. 일단 NYT로부터 광고를 빼앗기 위한 전략이다. 자매지인 뉴욕포스트와 묶어서 광고를 구매하면 더 많이 깎아준다.
◇ NYT, 일단 수성 성공 자신감 = NYT는 가격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피하고 있다. 아직은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미지 광고로 대응하고 있다. NYT는 지난 5월 15일 WSJ를 겨냥해 ‘숫자들(Numbers)’이라는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6주간 이어지는 광고에서 NYT는 두 신문의 구독자와 온라인 뉴스 이용자 등 객관적 숫자를 비교하고 있다.
뉴욕 시장에서 자사의 매체 영향력과 광고 효과가 WSJ에 비할 바 아니라는 자신감이다. 마케팅·판매 담당 부사장인 야스민 나미니는 “광고를 통해 NYT가 뉴욕에서 충성도가 높고 영향력 있는 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며 “숫자가 모든 걸 말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재닛 로빈슨 NYT 사장은 “온·오프라인을 모두 포함해 우리의 독자는 2200만 명인데 비해 WSJ는 1300만 명”이라며 “광고 시장에서 우리 고객들이 돌아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WSJ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다. WSJ는 바로 다음날 ‘어헤드 오브 더 타임스(Ahead of the Times)’라는 문구로 광고를 냈다. 이 문구는 ‘NYT를 앞서는’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 ‘시대를 앞서가는’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WSJ는 광고에서 “NYT가 지국을 폐쇄하고 섹션들을 없애는 동안 WSJ는 지면 개혁에 전례 없는 투자를 했다”며 “콘텐츠 강화와 지역·국제판 확대, 디지털화 등으로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독자에게 고품격 뉴스와 통찰력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광고는 WSJ 매거진과 웹사이트, WSJ 샌프란시스코판 등에도 실렸다.
◇ 하나가 죽어야 하는 숙명의 대결? = 이런 상황에서 WSJ의 광고 문구 도용 문제가 불거진 것. NYT는 일단 WSJ의 파상 공세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로빈슨 사장은 지난 6월 4일 “WSJ가 광고 단가를 인하하고 신문 가격을 할인하고 있지만 우리 신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할인한다고요? 계속 하라고 그러세요(Are they discounting? Yes, They are, very, very, very heavily)”라고 말했다.
미 언론들은 두 신문 간 싸움이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이번 싸움은 단순히 뉴욕 광고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언론 시장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이기 때문이다.
현재 뉴욕 시장과 인터넷, 유료 부수에서는 NYT가 우월하다. 그러나 전국적으로는 WSJ가 잘나간다. 3월 말 현재 NYT의 발행 부수는 95만1063부로 집계됐다. 이 수치는 6개월 동안 8.5%가 줄어든 것이다. WSJ는 209만 부다. 1%가 늘었다.
그러나 유료 발행 부수 면에서는 다르다고 한다. NYT는 자사 광고에서 종이 신문 유료 발행 부수가 42만8228부로 WSJ에 앞선다고 주장했다.
인터넷의 경우 무료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NYT가 앞선다. NYT의 월간 웹사이트 방문자는 1990만 명이다. 지난 2007년부터 일찍 유료화를 단행한 WSJ의 방문자는 1180만 명이다. 뉴욕과 인터넷 유료 부수 등 충성도 면에서는 NYT가, 자본력과 전국적인 인기도 면에서는 WSJ가 앞서고 있는 것이다.
미 언론들은 세계적인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이 2007년 WSJ를 인수한 후 종합 일간지화를 추구하고 있어 두 신문 간의 온·오프라인 경쟁은 앞으로 더 많은 지역과 분야에서 빈번해지고 격렬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박수진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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