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MASOK 공동기획① - 김정일 삼성생명 마케팅전략그룹 상무

[마케팅 고수의 비밀노트] “마케팅은 영감 아닌 숫자의 연금술”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마케터.’ 마케터의 ‘꿈’이다. 하지만 ‘꿈’을 이루는 마케터는 많지 않다. 현실은 냉혹하다. 대다수 제품과 서비스는 꽃도 피우지 못하고 지거나 잠깐 피었다가 금세 시들해진다.

짭짤한 ‘실패의 눈물’을 수없이 흘려야 감미로운 ‘기쁨의 눈물’을 한 번 맛볼 수 있는 세계가 마케팅이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젊은 마케터들을 위해 한국마케팅협회(MASOK)와 공동 기획으로 마케팅 고수들의 리얼 스토리를 담은 ‘마케팅 고수의 비밀노트’를 연재한다.

‘마케팅 고수의 비밀노트’의 첫 번째 주인공은 김정일 삼성생명 마케팅전략그룹 상무다. 미국 유수의 기업에서 한국 기업으로 옮긴 이력이 독특한 데다 각종 마케팅 노하우가 별 소용이 없어 보이는 생명보험사의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김 상무가 보내온 프로필은 화려하다. 하버드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헬스케어 컨설팅사인 헬스케어시스템디자인과 미국 최고 연구 기관으로 손꼽히는 벨(Bell)연구소, 세계 최대 텔레콤사인 AT&T에서 일하다가 지난 2005년 삼성생명에 영입됐다.

김 상무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88년이다. 연세대 통계학과 석사과정을 마친 뒤 세브란스병원 예방의학교실에서 근무했던 그는 교수의 꿈을 품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통계학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첫 직장인 헬스케어시스템디자인에 입사한 것은 1992년이다. 미국의 의료보험을 운영하고 있는 민간 회사들은 양질의 병원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헬스케어시스템디자인은 같은 규모 병원들의 등급을 매겨 고객사인 건강보험사에 제공하는 회사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95년 벨연구소로 스카우트됐다. 그곳에서는 그래픽 애널리스트로 활동했는데, 각종 통계를 그림을 통해 분류하고 분석하는 일을 했다. 1997년 벨연구소의 모기업인 AT&T로 자리를 옮긴 그는 지난 2004년까지 마케팅 성과 분석을 전담하는 마케팅퍼포먼스그룹과 IT그룹 등에서 일했다.

2000년대 초·중반은 삼성그룹이 글로벌 인재 영입에 발 벗고 나선 때다. 당시 삼성생명 배정충 사장이 그를 만나러 직접 미국으로 건너왔다. 배 사장이 물었다. “당신이 마케팅을 잘할지 모르지만 보험은 모르지 않느냐?” 그가 대답했다.

“저는 세일즈맨이 아니고 마케터입니다. 마케터는 고무신을 팔다가도 어느 날부터 TV도 팔 줄 알아야 합니다.” 배 사장의 ‘OK’ 사인을 받은 그는 미국으로 떠난 지 17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서 일한 지 6년째다. 과연 ‘미국의 마케터’가 ‘한국의 마케터’로 잘 적응했을까. 더구나 그가 몸담은 곳은 제조업체가 아니라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금융회사가 아닌가. 실제로 한국에서의 새 출발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금융업은 제조업에서 펼치는 마케팅과 차원이 달랐다.

“제조업은 제품과 가격의 차별화를 이용해 마케팅을 하지만 금융업은 여·수신 금리 차이를 이용해 회사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장기 상품을 파는 보험업은 더 어렵죠. 신상품을 만들면 6개월 안에 카피 제품이 나오는 게 보험업계의 풍토예요. 가격 차별화도 거의 없고요.” 더구나 국내 보험업계 특성상 영업 조직(보험설계사)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처음에는 마케팅이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토로다.

보험 영업에 IT 접목

이런 상황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영업 지원 시스템이었다. 보험설계사(FC)의 영업이 ‘주먹구구식’이라는 판단에서다. FC의 영업 활동으로 수익을 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위한 지원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는 곧바로 “영업 효율화‘를 마케팅 목표로 설정했다. “개별 FC가 확보하고 있는 수백 명의 고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매달 초 찾아갈 타깃 고객을 알려주고 방문 활동을 시스템화하는 겁니다. 신상품이 출시될 경우 구매 가능성이 높은 고객 리스트를 작성해 FC에게 나눠주는 것도 그 일환이었어요.”

그렇게 탄생한 게 이른바 ‘라사마(Life Cycle Marketing)’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지리 정보 시스템(GIS)을 이용해 gCRM(GIS 기술을 고객관계관리에 접목한 것)도 구축했다. 지도 기반 위에서 고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컨대 다음날 찾아갈 고객을 입력하면 어떤 순서로 찾아갈지 알려준다. 고객과의 약속이 취소될 경우 근처에 있는 유사한 고객 리스트도 띄워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FC의 활동량이 증가하니 자연스레 영업도 활성화됐다”고 말했다.

김 상무가 개발한 ‘라사마’를 지금은 거의 모든 FC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결코 그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gCRM 구축도 마찬가지였다. 비용 문제로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금융업계에서 이런 현상은 낯선 게 아니다. 영업 조직이 강한 회사일수록 마케팅은 약할 수밖에 없는 게 이치다.

최고경영자(CEO)에게도 마케팅은 최우선 과제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CEO는 빠른 변화를 원하지만 마케팅 효과는 점진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의 해법은 단순하다. 마케터가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부서에서 상호 교차하는 이슈를 우선 선점해야 합니다. 마케팅 전략 달성에 여러 부서의 동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설득해야 되고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듯이 실패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라사마’를 구축한 뒤 이를 모바일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내부 반발을 무릅쓰고 모바일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당시 통신 기반이나 인프라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앞서나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다른 부서에서 다시 론칭해 지금은 회사 차원에서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마케팅에서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마케터는 결코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곤란하다”고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마케팅과 영업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영업은 상품을 적극 팔아 이윤을 내려는 행위”라며 “마케팅은 이와 달리 목표 고객의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고객 만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결론적으로 “고객의 감동을 유지해 이익을 올리는 게 마케팅”이라는 설명이다.

김 상무의 꿈은 여전히 ‘최고의 마케터’가 되는 것이다. 그 ‘꿈’을 위해 지금도 각종 콘퍼런스를 ‘악착같이’ 쫓아다니고 대학이나 기업이 강의를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케팅 고수’ 김정일 상무의 ‘비밀노트’엔 ‘비밀’이 없는 대신 ‘기본’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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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후배 마케터를 위한 Tip

“부지런한 마케터가 살아남는다”

“마케팅은 숫자다.” 김정일 삼성생명 마케팅전략그룹 상무의 얘기다. 이제 영감이 중시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김 상무는 “모차르트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시대에는 인문학에 기반을 둔 영감이 전략을 만들었지만 세상이 복잡해지고 세분화된 현대에는 결국 데이터에 기반을 둔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케팅은 컨버전스다.” 그는 “컨버전스를 모르고는 마케팅을 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정보기술(IT)과 트위터·블로그 등 소셜 미디어를 무시하고 마케팅을 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숫자와 컨버전스를 알기 위해서는 무조건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며 “똑똑한 마케터가 아니라 부지런한 마케터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마케팅은 투자수익률(ROI)이다.”

그는 “한국 마케팅과 미국 마케팅의 차이점 중의 하나로 한국 마케팅은 ROI 측정 없이 움직인다”는 점을 들었다. 어떤 상품을 만들면 경쟁력이 있는지 비교 분석하기 위해서는 성과 분석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김 상무가 후배들에게 추천하는 한 권의 책은 ‘CEO에서 사원까지 마케팅에 집중하라(김영사)’. 그는 “마케팅 전반을 아우르는 교과서 같은 책”이라며 “항상 옆에 두고 보고 또 봐도 새로운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김정일 상무는…

1959년생. 83년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졸업, 85년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석사. 88~92년 하버드대 통계 전공(석사학위 취득, 박사과정 수료). 헬스케어시스템디자인, 벨연구소, AT&T를 거쳐 2005년 1월부터 삼성생명에서 CRM과 마케팅 전략 업무 수행. 마케팅전략그룹 상무(현).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