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금융 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실한 재정 상태를 유지해 왔다. 경기 침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재정 적자가 2008년 GDP 대비 4.1%에서 2009년 11.4%로 급증했지만 정부 부채는 GDP의 55%로 여전히 낮다.

또한 2000년 이후 유럽연합(EU) 내에서 신축된 주택의 30%가 스페인이었을 정도로 스페인의 주택 경기는 호황 그 자체였다. 부동산 개발 업체들의 은행 대출액은 2000년 335억 유로에서 2008년 3180억 유로로 8년 동안 무려 8.5배나 증가했다.

건설 회사들에 대한 대출액까지 합칠 경우 건설 부문의 은행 대출 규모는 4700억 유로로 GDP의 약 50%를 차지할 정도다. 60년 만에 맞은 금융 위기에 따른 부동산 버블 붕괴의 후유증은 심각하다. 주택 가격은 최고점 대비 15~20%가량 하락한 상태이며, 거래량도 40% 가까이 감소했다.

2008년 12월 당시 미분양 신규 주택은 61만4000채에 달했다. 그 당시 건설 중이었던 주택은 62만7000채에 이르렀다.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현재 미분양 주택은 100만 채를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 은행은 일반 대형 은행과 저축은행으로 구분된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곳은 ‘카하(Caja)’라고 불리는 저축은행이다.

저축은행은 일반 은행으로부터 대출 받기 어려운 개인 및 지역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고 이익의 환원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된 비상장 은행이다. 저축은행은 영업 지역 제한 완화, 주택 경기 호황 등에 힘입어 스페인 대출 자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한마디로 지방 경제와 서민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존재다. 현재 스페인에는 45개의 저축은행이 있다. 2007년 이후 저축은행은 모기지 대출을 경쟁적으로 확대한 결과 모기지 대출 비중이 18%로 일반 은행(12.5%)을 크게 웃돌고 있다. 경기 침체에 따른 주택 분양 저조, 지가 하락 등으로 저축은행의 부실 자산이 급증해 현재 위기의 뇌관이 되고 있다.

스페인 정부는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008년부터 저축은행의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작년 6월에는 은행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 990억 유로의 은행구조조정기금(FROB)을 조성했다. 하지만 그동안 저축은행들의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와 신용 평가 회사들의 신용 등급 하향 조정에 직면한 스페인 정부가 결국 저축은행에 대해 칼을 빼들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부실이 심한 저축은행들을 통폐합하는 것이다.

스페인 중앙은행은 5월 22일 파산 위기에 처한 가톨릭교회 소유의 저축은행인 카하수르(CajaSur)를 국유화했다. 이를 계기로 현재 저축은행 간 합병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스페인 정부의 신속한 은행 구조조정 여부가 제2의 금융위기를 차단할 수 있느냐를 좌우할 것이다. 구조조정을 통해 저축은행의 부실이 신속히 처리될 경우 정부 재정의 악화는 불가피하겠지만, 불확실성이 제거돼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조정 결과 새롭게 태어난 저축은행들은 정부 지원을 받아 충분한 대손충당금을 적립하고 회사채 발행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자본을 조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논리에 따라 구조조정이 지연되거나 형식적인 합병에 그칠 경우에는 저축은행들은 채무 상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시장에서 강제 퇴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스페인 은행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위기로 발전할 것이다. 이 경우 스페인 은행에 익스포저(위험 노출)가 많은 독일(2380억 달러), 프랑스(2200억 달러), 네덜란드(1200억 달러) 등 유럽 금융회사들이 대규모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세계 각국은 스페인 정부의 과감하고 신속한 구조조정을 주문하고 있다. 스페인의 은행 구조조정은 남유럽 재정 위기의 방지는 물론 유로화의 운명과 세계경제의 회복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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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


약력 :
1961년생. 85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2005년 서강대 박사(국제경영학). 87년 삼성경제연구소 입사. 91년 삼성전자 브뤼셀사무소 근무. 97년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 연구실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