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여의도 정보맨(IO)의 24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원 김수집 과장은 소위 말하는 IO(Intelligence Operator), 속칭 ‘정보맨’이다. 그룹 기업문화실 소속인 그가 하는 일은 공식적으로는 ‘시장 동향 파악’, 비공식적으로는 ‘루머 수집’이다. 정보맨들의 소속은 기업마다 제각각이다. 홍보실 소속인 곳도 있고 대외협력처 또는 시장분석팀인 곳도 있다.

출근 후 김 과장의 아침은 비교적 한가하다. 일간지 3~4개를 읽으며 오늘의 이슈를 파악하고 인터넷 뉴스를 통해 네티즌들이 관심을 보이는 기사들을 체크한다. 오전 10시 팀장에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온다. 특별히 갈 곳은 없지만 그렇다고 정보맨이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팀장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은 누구랑 밥 먹지?’ 특별한 약속이 없는 김 과장은 여의도로 향했다. 여의도는 정보맨들의 집결지다. 여의도 외에 서초동 검찰청과 명동 사채시장도 정보맨들이 모이는 곳이다.
[활개치는 증권가 루머 '진실이냐 거짓이냐'] 여의도·서초동 ‘정보 사냥꾼’ 집결지
마침 날씨도 좋아 김 과장은 국회의사당 ○○관 야외 벤치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신문을 읽고 있자 D증권사 시장분석팀 이복남 과장이 다가왔다.

담배를 나눠 피우다가 이 과장에게 “오늘 점심 약속 있어?”라고 물었다. K 의원 보좌관과 점심 약속이 있다고 했다. “나도 가도 될까?”라고 묻자 동석해도 된다고 했다.

이 과장이 “요즘 A 의원이 사무실 여직원과 심상치 않다던데, 들었어?”라고 물었다. 금시초문이다. “뭐? 어떤 관곈데?” 이 과장도 자세히는 모르겠고 이따가 K 의원 보좌관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다. 김 과장은 ‘오늘은 그걸로 정보보고를 때우면 되겠군’이라며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초짜 정보맨으로 보이는 이가 쭈뼛쭈뼛 다가와 인사한다. “저기, 전 H기업에서 나왔는데, 혹시?” “아, H기업이세요? 명함이나 주시죠?” 이 과장이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

김 과장은 문득 3년 전 초짜 정보맨일 때가 떠올랐다. 막상 발령을 받았는데, 어디 가서 무슨 정보를 캐오라는 건지 막막할 때 팀장은 ‘국회의사당 ○○관에 가 보라’는 말만 했다. 이렇게 해서 정보 모임에 끼게 되는 것이다.

11시 30분에 보좌관과 만나 점심을 먹으며 의원 회관 내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특히 A 의원의 스캔들에 관해 물어봤다. A 의원이 대낮에 영등포의 한 호텔에서 여직원과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러브호텔이라 업무 목적으로 들어간 것 같지는 않다. 누가 봤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식사 후 보좌관과 헤어진 뒤 정보맨들의 사랑방이라고 불리는 한국거래소 내 회의실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 있던 안면이 있는 증권사·검찰 쪽 정보맨들과 당구를 치러 갔다. 당구 두 게임을 친 뒤 정보맨들의 사랑방으로 통하는 여의도 △△호텔 커피숍으로 갔다. 이날의 화제는 A 의원의 스캔들이었다.

갑자기 김 과장은 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회사 임원 한 명이 “어제 마약 복용 혐의로 구속된 여자 연예인이 누구인지 좀 알아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 과장은 슬며시 짜증을 느꼈다.

회사 업무와 관련도 없는데 괜히 궁금해서 팀장에게 전화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것을 모른다고 하면 ‘그런 것도 모르면서 하는 일이 대체 뭐냐’란 욕을 듣기 때문에 평소 알던 P 기자에게 전화해 물어보았다. 나이트클럽은 어딘지 알겠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고 얘기했다. 동석한 경찰 정보과 형사에게 물어보자 경찰서로 전화를 몇 번 걸더니 누구인지 알려줬다.

오후 4시는 정보맨들이 가장 바쁠 때이자 똥줄이 타는 시간이다. 회사에 정보보고를 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 국회도서관 2층 정보검색실에서 넥타이를 맨 회사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바삐 마우스를 놀리고 있다면 IO일 가능성이 크다.

초보 정보맨들은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야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베테랑 정보맨들은 메일 의존도가 커진다. 팀장급이 되면 사무실에 앉아서도 여의도 바닥을 손바닥 보듯 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 과장은 자신의 메일함을 열어 10통의 메일이 와 있는 것을 확인한다. 다른 회사 정보맨들이 보낸 것들로 9개는 다 아는 얘기였고 1개만이 솔깃한 얘기를 담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루머와 관련된 인물들의 신상정보를 덧붙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아마 오늘 각 기업·국정원·검찰·국세청·금융감독원·증권사·은행·기자들 사이에서 A 의원의 스캔들이 정보보고로 올라갈 것이다. 지역구의 경쟁자가 퍼뜨린 소문일 수도 있고, 누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A 의원의 스캔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만천하에 퍼지게 됐다. 김 과장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일도 아니군’이라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김 과장 일행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여의도에서 3년 있었더니 온갖 맛집, 술집은 다 꿸 정도다. 여의도에는 온갖 조직에서 정보맨들이 돌아다니지만 술값을 계산하는 것은 늘 대기업 정보맨들이다.

대기업 정보맨들의 한 달 활동비는 300만~500만 원 정도이지만 자기 회사와 관련된 이슈가 있을 때는 사실상 무제한으로 올라간다. 세금을 먹고 사는 기관 소속은 200만~300만 원 정도로 좀 작은 편이다. 이들은 늘 대기업 정보맨들에게 얻어먹지만 기자를 만날 때는 자신들이 내기도 한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팀원들이 보낸 정보보고 3개가 내용이 겹치니 2개씩 추가로 보내라는 것이다. 김 과장은 이럴 때를 대비해 예비로 비축한 루머 2개를 추가로 올리고 나머지 하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해결했다. 이렇게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이 기사는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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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국내 증시 루머 감시 체계

금감원 조사 자체가 새로운 루머 되기도
[활개치는 증권가 루머 '진실이냐 거짓이냐'] 여의도·서초동 ‘정보 사냥꾼’ 집결지
증시 루머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곳은 한국거래소 시장감시본부 시장정보분석팀이다. 그러나 모든 루머에 대해 일일이 감시하지는 않는다. 구체적 종목의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감시 대상이 된다.

일례로 최근 돌았던 ‘일본 신용 등급 하락설’에 대해서는 대응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또 단순한 낭설에 그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일일이 대응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 ‘루머로서 밸류에이션(valuation:가치 평가)이 없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특정 기업에 대한 소문이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감지하면 곧바로 해당 기업에 조회공시를 의뢰한다. 한국거래소는 시장주최자으로서 시장 정화의 목적으로 루머를 감시하지만 조회공시 외에 해당 기업에 대한 조사권은 없다.

루머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 의심이 든다면 한국거래소에서 금융감독원으로 통보된다. 이를테면 신기술 개발을 통해 수십 배의 시세 차익이 예상된다는 식의 루머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이 일일이 모든 루머에 대해 대응하기는 힘들다.

금감원 시장감시팀 윤동인 팀장은 “금감원이 조사에 나섰다는 얘기가 돌면 그 루머가 기정사실화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입장”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예를 들어 A기업의 오너가 내부자 거래로 시세 차익을 봤다는 소문을 감지한 금융감독원이 조사에 나섰다는 얘기가 퍼지면 A기업의 의혹이 기정사실화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금감원은 “과학적·합리적 의심이 들 때만 정밀 조사에 나선다”고 얘기하고 있다.

금감원이 자체 조사를 통해 불공정 거래가 의심된다고 판단되면 금감원 내 증권선물위원회를 거쳐 검찰에 고발하게 된다. 고발된 모든 내용이 모두 수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검찰에서도 자체 내사를 통해 수사할지 말지 결정한 뒤 충분한 정황이 있을 때만 수사에 나선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