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주가 대폭락 미스터리

<YONHAP PHOTO-0426> Dennis Leporin watches the monitor on the trading floor of the New York Stock Exchange Tuesday, May 4, 2010, in New York. Stocks plunged around the world Tuesday as fears spread that Europe's attempt to contain Greece's debt crisis would fail. (AP Photo/David Karp)/2010-05-05 03:38:00/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Dennis Leporin watches the monitor on the trading floor of the New York Stock Exchange Tuesday, May 4, 2010, in New York. Stocks plunged around the world Tuesday as fears spread that Europe's attempt to contain Greece's debt crisis would fail. (AP Photo/David Karp)/2010-05-05 03:38:00/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미국에 살면서 이해되지 않는 게 몇 가지 있다. 자유와 평화의 전파자를 자임하는 나라에서 아직도 흑인과 백인 학생이 따로 수도와 화장실을 이용하는 고등학교가 버젓이 존재하고,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지만 약간의 눈발만 비쳐도 제설 장비 부족으로 교통이 두절되는 지역이 있는 게 미국이다.

또 입만 열면 아이들의 보호를 외치지만 맞벌이 부부의 출근 시간을 늦출 수 없다는 이유로 새벽 6시면 아이들을 깨워 아침도 먹이지 않고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는 걸 보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미 금융시장에선 좀 더 쇼킹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입만 열면 투명성과 도덕성을 외치는 나라에서 전직 증권 감독 당국 수장이 ‘다단계 금융 사기’ 혐의로 구속되고 세계 최대 투자은행이라는 골드만삭스는 고객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혐의로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믿을 놈이 없다’는 시쳇말이 여기서도 예외는 아닌 셈이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얼마 전 5월 6일 있었던 주식 폭락 사태다.

이번 주가 폭락 사태는 미 언론들이 ‘입이 쫙 벌어지는(Jaw-dropping)’ 또는 ‘속이 울렁거리는(stomach-churning)’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의 쇼킹한 사건이었다. 1792년 미 주식시장 개장 이후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큰 폭’으로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주가가 20분 만에 10%, 약 1000(정확히 998.5)으로 곤두박질쳤으니 그럴 만하다.

수십 달러씩 하던 주식이 단돈 1센트로 곤두박질치면서 1조 달러에 달하는 주식 가치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제2의 금융 위기설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화들짝 놀랐고 금융시장은 쓰나미 앞의 배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그리스 지원 방침 발표 후 시장은 급속히 평상심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미 정부와 언론, 시장 참여자들은 이번 사태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됐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 골몰하고 있다.

◇ 손놀림 실수 때문? = 사건 발생 1주일이 넘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 언론들은 △중개인 주문 실수로 인한 해프닝 가능성 △헤지 펀드의 탐욕과 초고속 프로그램 매매 문제가 결합된 합작품 △유럽발 재정 위기론에 따른 조정기 진입론 △거래소 간 시스템 불일치로 인한 위기 증폭론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은 중개인 주문 실수로 인한 해프닝이라는 분석이다. 이날 시장은 그리스 재정 위기에 대한 부정적 전망 때문에 9시 30분 장이 열리자마자 팔자 주문이 쏟아졌다. 이런 분위기는 오후 2시께 그리스 폭동 악화와 유럽연합(EU)의 그리스 지원이 소극적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 악화됐다. 유로 가치가 떨어지고 금값이 오르고 주가가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게 ‘프록터앤드갬블’ 매도 주문이었다. 오후 2시 40분 ‘블루칩 중의 블루칩’으로 불리는 P&G 주식 ‘10억 주’를 팔겠다는 주문이 나왔다. 이후 시장은 갑자기 패닉 상태로 변했고 플로어엔 팔자 주문이 쏟아지면서 대공황 장세가 펼쳐졌다. P&G 주식은 주당 56달러에서 10분도 채 안 돼 휴지 조각(주당 1센트)으로 변했다.

미 언론들은 한 중개인이 P&G 매도 주문을 내면서 ‘밀리언(100만)’ 버튼 대신 ‘빌리언(10억)’ 버튼을 잘못 누르는 바람에 이 같은 대폭락 장세가 연출됐다는 분석을 제기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알파벳 ‘M’을 ‘B’로 잘못 누르는 바람에 세계 최대 금융시장에서 사상 최대의 낙폭을 기록한 역사적인 실수가 된다.

메리 사피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은 “1000에 가까운 폭락 사태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주문 입력 실수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컴퓨터 주식거래의 재앙? = 한 중개인의 주문 실수가 그 같은 대공황 장세로 곧바로 이어지기는 힘들다. 미 언론들은 최근 급속히 늘고 있는 초고속 온라인 주식거래 시스템이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미 트레이더들은 ‘초고속 단타 거래(High Frequency Trading)’로 불리는 시스템을 이용해 1000분의 1초 만에 주문을 낼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주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자동 매도 주문을 내게 돼 있다. 일정한 손해가 발생하면 손실을 줄이도록 자동으로 주식을 파는 ‘로스 컷(loss-cut)’ 방식이다.

P&G 매도 주문이 나간 2시 40분 이후 플로어에선 매도 주문이 쏟아졌고 컴퓨터 프로그램들도 순식간에 자동 매도 주문을 쏟아내게 된다. 컴퓨터가 여러 시장과 연동돼 있기 때문에 이런 주문은 환시장과 채권시장 등 모든 자산 클래스로 순식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매도 주문이 과도하게 쌓이자 오후 2시 45분께 이런 초고속 단타 거래 시스템을 운영하는 운영 회사들이 시스템을 아예 꺼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거래를 막은 결과 주가가 더 떨어졌다. 한쪽에서 쌓이는 매도 주문이 다른 쪽의 매수 주문과 연결되지 못하면서 시스템이 중단된 2분 동안 매도 주문만 쌓이다 결국 주가 폭락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급락 원인 ‘미궁’…규제 강화 ‘한목소리’
◇ 헤지 펀드의 준동? =
월스트리트저널은 헤지 펀드의 투기가 사태를 악화시킨 혐의가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헤지 펀드 ‘유니버스 인베스트먼트’가 시장이 공황 상태였던 오후 2시 15분께 주가가 떨어지면 이익을 보는 옵션 5만 거래를 체결했다고 전했다.

이 계약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가 6월에 800선으로 떨어지면 40억 달러를 이익으로 챙길 수 있게 돼 있다. 계약 당시 주가지수는 1145였다. 완전히 폭락장에 걸고 베팅한 셈이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비슷한 계약들이 잇따라 체결됐고, 다른 쪽에선 주가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쪽의 옵션 계약이 체결됐다. 문제는 반대 옵션을 매입한 투자자들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현물시장에서 주가가 떨어지면 더 주식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폭락 장세를 부채질했다는 게 신문의 분석이다.

◇ 시장 조정기 진입? = 이런 주식시장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점 외에 이번 사태는 유럽 일부 국가들의 재정위기에 따른 신용위기 초기 상황이라는 분석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날 증시 그래프가 지난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 당시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주가가 이날 결국 장중 낙폭의 3분의 2가량을 회복하긴 했지만 하루에 다우지수, S&P500지수, 나스닥 종합지수 등 3개 지수가 모두 3% 이상 하락한 것은 증시 자체의 휘발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채권 투자 회사 핌코(Pimco)의 최고경영자 모하메드 엘-에리언은 “한 나라(그리스)에서 시작된 위기가 지역 문제가 되고 유로존 전체에 충격을 주는 것을 목격해 왔으며, 이는 이제 전 세계의 문제가 되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 정부와 의회는 이 같은 주식 대폭락 사태가 중개인 개인의 사소한 실수에 근거하기보다 주식시장 자체의 구조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원인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 의회는 최근 사태에 대한 강경 대응을 시사하며 정책 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시장 전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규정 마련은 물론 초단타 거래에 대한 규제의 고삐도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토퍼 도드 상원 은행위원회 위원장은 CBS에 출연해 “시장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서킷브레이커(주식거래 중단 제도)가 필요하다”며 “초단타 거래나 마이크로초 단위로 거래할 수 있는 컴퓨터가 이번 주식 급락을 이끌었다”고 비판했다.

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박수진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