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오 스톤진 사장

28년 청바지 ‘한 우물’…국내 생산 ‘고집’
중학교를 중퇴한 충남 예산 산골 출신의 한 소년이 1978년 상경했다. 그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땅이 푹푹 잘 빠졌다. 농사짓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한 소년은 낯선 서울에 새 보금자리를 잡았다.

권투가 큰 인기를 끌던 시절이어서 소년은 상경 후 자연스럽게 체육관을 찾아 글러브를 꼈다. 샌드백을 두드리며 꿈을 키웠고, 언젠가는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꼭 오르고야 말겠다는 다짐도 했다.

하지만 권투 선수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꿈을 이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경기가 없을 때는 유명 선수의 스파링 파트너로 링에 올랐다.

고(故) 김득구 선수가 1982년 미국에서 레이 맨시니 선수와 세계 타이틀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이기 직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스파링 파트너도 그의 몫이었다. 김득구 선수가 경기 중 부상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는 소년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소년은 군대 제대 후 인생 항로를 바꿔 의류 분야에 투신했다.

셋째 형이 예신피제이 창업자 박상돈 회장

청바지로 유명한 이기진(IGII Jeans) 브랜드를 만드는 (주)스톤진 박상오(47) 대표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지금은 청바지 사업가로 의류 업계에서 자기만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하루하루 편할 날이 별로 없었다.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오니 참 막막했죠. 공부도 다시 시작해야 했고 자리도 잡아야 하니 만만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더구나 나이도 어려 꿈은 많지만 쉽게 이뤄지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의류 쪽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형의 영향이 컸다. 예신피제이 창업자인 박상돈 회장이 그의 셋째 형이다. 예신은 마루·노튼·옹골·코데즈컴바인 등의 브랜드로 유명한 회사로 박 회장은 의류 사업을 하며 동생인 그에게 의류 쪽 일을 가르쳤다.

스무 살이던 1983년 군 제대 후 형의 부름을 받고 밑에 들어가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당시는 하청을 받아 조건에 맞는 의류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의류 제조 시스템을 알게 됐고 원단 보는 법에도 눈을 떴다. 동대문시장이 그의 주 활동 무대였다.

1998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형이 만들어 팔던 스톤진이라는 브랜드를 이어받으면서 독립했다. 형도 그에게 한번 나가서 실력을 발휘해 보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시장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라 경기가 얼어붙어 녹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 사장은 밤낮없이 뛰고 또 뛰며 위기를 헤쳐 나갔다. 그의 부인도 곁에서 원단을 고르고 디자인을 직접 챙기는 등 적극 도왔다.

“다행히 당시는 의류 소비가 크게 줄지 않았어요. 청바지라는 것이 워낙 서민들이 많이 사는 옷이고 의식주의 기본이어서 경기가 좋지 않았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죠. 게다가 열심히 뛰니 위기를 잘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박 사장은 2004년 다시 한 번 도전에 나선다. 역시 형이 운영하던 이기진(IGII Jeans) 브랜드를 가져온 것이다. 원래 이기진은 형이 백화점에 매장을 내고 판매를 하다가 잘 안 돼 접었던 브랜드다. 하지만 박 사장은 브랜드 이미지가 아직 남아 있는 데다 옷만 좋으면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져왔다. 판매 전략도 바꿨다.

백화점 대신 아울렛 매장을 집중 공략했다. 발로 직접 뛰며 매장을 넓힌 결과 지금은 전국에 23개 매장을 확보해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이미 죽은 브랜드를 살릴 수 있을지 우려를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멋지게 성공시킨 셈이다.

“이기진은 형이 할 때부터 브랜드 이미지가 좋았어요. 백화점 브랜드라는 강점도 있었고요. 상당수 소비자들이 외국 브랜드로 생각할 정도로 무게감도 있었죠. 게다가 저로서는 상의(청 재킷 등)를 하고 싶었는데 기존 브랜드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무게감이 떨어졌던 거죠. 그런데 이기진이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의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전체 제품 가운데 상의가 약 20%쯤 됩니다.”

박 사장은 이기진 브랜드를 통해 한 단계 도약했다. 물론 우연히 이뤄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비결이 있었다. 먼저 박 사장은 유행을 따라가는 데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다. 너무 앞서가지도 뒤처지지도 말자고 다짐했다. 중간쯤 따라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려면 진의 트렌드를 잘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수시로 시장에 나가 살피고 생산을 국내에서 직접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상당수 의류 업체들이 중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겼지만 박 사장은 다르게 생각했다.

6년 전 큰 손실 딛고 다시 우뚝

“생산을 중국에서 하게 되면 국내 소비자들의 유행을 따라가기 힘들죠. 몇 달 전에 미리 주문해야 하는데 막상 판매할 시점에 트렌드가 바뀌면 재고로 쌓아 놓을 수밖에 없다고 봤어요. 국내에서 직접 만들 경우 3~4일이면 제품이 나올 수 있으니 소비자들과 함께 호흡하려면 원가가 더 들더라도 국내에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20년의 경험을 통해 쌓은 노하우도 한몫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박 사장은 원단을 보는 눈이 뛰어났고, 이는 좋은 원단을 싸게 구입하는 원동력이 됐다. 자연히 질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져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한결 가볍게 해줬다.
하지만 그에게도 크고 작은 실패가 여러 번 찾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6년 전 기억은 떠올리기조차 싫다. 무려 10억 원의 손해를 보고 회사가 휘청거리는 경험을 맛봤다.

“당시 고가의 상의를 냈었죠. 무려 10억 원을 투자했고요. 원래 진 분야에서 상의는 주력이 아닌데 그때는 뭔가 될 것 같았죠. 베팅도 세게 했죠. 하지만 소비자들이 의외로 고가의 상의는 외면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제품이 창고에 쌓이니 참 막막하더군요. 하지만 배운 것도 많아요. 그 이후로는 절대 무리하지 않고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하자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죠. 내실 다지기에 주력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박 사장은 진의 종류를 많이 취급하지 않는다. 상품군을 상당히 단순하게 가져간다. 너무 많으면 관리하기도 어렵고 회사 내실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까닭이다.

“상품군을 30~40가지만 합니다. 다른 업체에 비하면 적은 편이죠. 경험상 종류만 많다고 잘되고 많이 팔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종류는 많지 않더라도 제품의 질과 디자인만 좋으면 어디서든 충분히 고객들의 니즈를 맞출 수 있다고 봅니다.”

박 사장은 요즘 9월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고생 끝에 장안동에 자체 사옥을 마련하고 가을에 입주하는 것이다. 으리으리한 사옥은 아니지만 30여 명의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꿈을 키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약력 : 1963년 예산 출생. 권투 선수를 하다가 83년 의류 업계 투신. 98년 스톤진 설립. 2004년 이기진 브랜드 출시.

28년 청바지 ‘한 우물’…국내 생산 ‘고집’
〈 회사 개요〉


회사 이름 :
스톤진
설립 연도 : 1998년 직원 수 : 30명
주력 제품 : 청바지 및 청 재킷 매출액 : 50억 원
주소 : 서울 동대문구 마장동 767-40



김상헌 기자 ksh123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