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드라마 미술감독 이진호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미술감독으로, 또 국내 유일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양성 아카데미의 대표로 내일의 한국 영상 산업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그가 바로 이진호 미술감독이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 중에는 아직 시작하지 않은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환히 꿰고 있는 이들도 많다. 오는 5월 방영될 드라마 ‘나쁜남자’는 김남길과 한가인 등의 톱스타들이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 외에도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눈의 여왕’ 등을 연출한 이형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고 해서 벌써부터 드라마 팬들 사이에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다.
미술감독의 역할 갈수록 중요해지죠
“이형민 연출 감독님과는 전작인 ‘눈의 여왕’, ‘천국의 우편배달부’에 이어 세 편째 함께 작업하는 셈이에요. 섬세하고 감각적인 장면을 추구하는 부분이 잘 맞다보니 계속 함께 작업하게 되는 것 같아요.”(이진호)

실제로 CF와 드라마·영화 등의 영상 산업 분야에서 이진호 미술감독은 연출 감독의 의도를 잘 살리되 가장 완성도 높은, 그러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이로 소문나 있다.

“프로덕션 디자인을 잘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나리오에 있는 장면을 그대로 시각화하거나 예쁘기만 한 세트를 만드는 것에 그쳐서는 안 돼요. 시나리오를 꼼꼼히 분석하고 주인공의 심리와 히스토리가 살아 있는 배경 공간과 색감 등의 비주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본과 시나리오를 분석해 감독의 연출 의도에 맞춰 작은 소품부터 전체 공간에 이르는 전반적인 비주얼을 만들어 내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때로는 시나리오에 없는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내는 일에도 일조한다.

영화 ‘싱글즈’에서 남녀 주인공이 얘기하던 옥탑방 마당이나 드라마 ‘눈의 여왕’에서 주인공 현빈이 살던 체육관 앞의 야외 테라스 같은 공간도 모두 이진호 감독이 넣자고 제안한 공간들이다.

“시나리오 속의 스토리를 표현하기에 더욱 적합한 공간이라는 생각에 제안한 공간들이죠. 이런 공간들이 만들어지면 스토리의 내용과 부합되면서도 더욱 풍부한 그림들을 얻을 수 있게 되고 영화든 드라마든 전체적인 미장센(무대 위에서의 등장인물의 배치나 역할·무대장치·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들이 더욱 화려해질 수 있죠.”

또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공간은 배우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할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지난해 이형민 감독이 연출하고 영웅재중과 한효주가 출연해 화제를 모은 텔레시네마(telecine: 텔레비전 영화)인 ‘천국의 우편배달부’를 찍었을 때도 그랬다.

“작품을 마치고 나중에 쫑파티를 하는데 한효주 씨가 와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봤던 그 어떤 미술 세트보다 디테일이 가장 살아있었고, 그 덕분에 그 공간에 들어갔을 때 자기가 실제 그 인물이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고요. 그래서 연기에 한결 더 몰입할 수 있었다고 인사하더군요.” 이처럼 배우와 연출자들에게 신뢰받는 프로덕션 디자인이 가능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미술감독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공간을 욕심내는 남자

“제가 처음 이 일을 배울 때 들은 말이 있어요. 그건 바로 미술감독은 세상의 모든 공간에 다 들어가 봐야 한다는 것이죠.” 미술감독이라면 심지어 ‘똥통’ 속에도 들어가 봐야 한다는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이 바로 영감의 원천’이라고 이야기한다.

“드라마 ‘눈의 여왕’을 작업할 당시 세팅 작업 도중 떨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수술실에서 마취 당하는 상태에서도 ‘아, 수술실의 몰딩은 저렇게 되어 있구나’, ‘수술실 내부는 이렇게 생겼구나’라며 살펴보다 마취가 된 적도 있어요.(웃음)”

항상 관찰력을 달고 살아야 하고 한 번 본 것들은 기억 속에 담아 놓았다가 다시 써먹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 미술감독으로서 그 상황을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유난히 작품들의 프레프로덕션(Pre-Production:제작 전) 단계에 공을 많이 들인다.

“기획 단계가 바로 프레프로덕션 단계로, 일종의 밑그림인 까닭에 가장 중요한 단계이기도 하죠. 프레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첫째도 둘째도 늘 콘셉트를 생각해요. 전체 콘셉트 계획을 잡고 휘하에 있는 세트팀·소도구팀·의상팀들에게 콘셉트를 전달해 더 디테일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일을 진행하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역할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나라 영상 산업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 년 전부터다. 그전까지는 ‘미술감독’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것이 사실이다.

“저 역시도 1996년께부터 이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미술감독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정확하게 알고 시작한 게 아니에요. 그저 미술이 좋아, 영화가 좋아 이쪽 일을 하다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 잘한다는 칭찬과 함께 계속 일이 주어지다 보니 지금에까지 이른 거죠.”

미술감독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던 것은 비단 그만은 아니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 어떻게 해야 미술감독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가 2007년 한국 영화 미술, 공간 연출 아카데미인 ‘레이크사이드’를 만들기 전에는 미술감독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레이크사이드를 왜 만들었냐고 많이 물으시는데, 답은 간단해요. 너무 답답했으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여러 미술감독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인데, 새롭게 직원을 뽑을 때 보면 영화 미술과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성실하게 보여 일을 가르쳐 보겠다고 뽑아 놓아도 막상 현장에서 ‘이런 일인지 몰랐어요’라며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미술감독의 역할 갈수록 중요해지죠
미장센으로 승부 거는 연출가가 꿈

그 때문에 그가 영화 미술 아카데미를 열겠다고 했을 때 많은 영화인들이 무척이나 반겼다고 한다. 시나리오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영화 제작까지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실제 체험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한국 영화의 실정에 맞는 영화 미술인을 양성하는 ‘레이크사이드’의 강사진에 많은 전·현직 영화인들이 포함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각종 현장 노하우를 전수받은 그의 제자들은 덕분에 각종 영화·드라마·CF 미술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이진호 감독은 작품 활동하랴, 아카데미 운영하랴 바쁜 와중에도 1년이면 한두 차례씩 프로덕션 디자인 전시회를 열곤 한다. “아카데미를 한다고 해서 저한테 경제적인 이득이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아카데미 경영비를 충당하고 있죠. 프로덕션 디자인 전시회도 마찬가지예요. 무료로 열기 때문에 오히려 사비가 더 많이 들어가죠.”

경제적인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 이처럼 열과 성을 다 기울이는 이유는 모두 미술감독이라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전문성을 지닌 미술감독을 더 많이 양성하고 싶다는 욕심에서다.

“영화감독이 100명이면 미술감독도 100명이 있어야 하죠.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으니까 저라도 나서서 미술감독의 역할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진짜 재능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려고 애쓰는 것이죠.” 물론 그 역시 아직도 젊은 만큼 미술감독 본연으로서의 꿈도 있다.

“허황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웃음) 할리우드의 팀 버튼 같은, 연출을 하면서 미술을 하는 그런 감독이 되고 싶어요. 프로덕션 디자인을 포기하고 연출자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술감독으로서의 특기를 살려 진짜 미장센으로 승부를 거는 그런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이진호 약력 : 1996년부터 각종 뮤직비디오·CF·장편영화 등의 미술팀에서 일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싱글즈’,‘야수’,‘와니와 준하’, ‘눈물’, 드라마 ‘눈의 여왕’, ‘천국의 우편배달부’, ‘나쁜남자(오는 5월 방영)’, 삼성전자 홍보 영상, (주)애경 홍보 영상, 각종 제과류 CF, 이동통신 CF 등의 미술감독으로 활약했다. 현재 한국영화미술, 공간연출 아카데미인 ‘레이크사이드’의 대표로 있다.

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