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속에 들어와 있는 든든한 울타리
4남 3녀의 7남매 중 막내인 필자는 아버지가 48세 때 늦둥이로 태어났다. 지금 내 나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보다 훌쩍 많아졌고, 올해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2년이 되었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는 85년 평생을 가정과 직장에 충실한 분이셨다. 늘 정직하고 솔직하셨던 아버지는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셨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가 생각난다. 집을 떠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기대와 흥분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잘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어나자마자 먼저 화장실부터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다. 수학여행 첫날 아침, 과연 화장실에는 긴 줄이 서 있었다.

급한데 빨리 나오라는 괴성도 들리고,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말 때문에 시원하게 보지 못했다는 푸념 섞인 말도 오갔다.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신 아버지의 가르침이 낯선 여행지의 단체 생활에서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나는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배변 보는 습관을 가지게 됐고 무슨 일이든 미리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단독주택에 살았는데, 별채는 세를 놓았다. 세입자가 들어오면 아버지는 늘 입주자 가족을 초청해 식사 대접을 하곤 하셨다. 당시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들이 우리 집에 들렀을 때 혹여 밥이 떨어져 없으면 아버지는 드시던 밥까지 덜어 주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말을 웬만하면 들어 주려고 애쓰셨다. 늦은 나이에 낳은 막내아들의 기를 살려 주려고 그러셨는지 특히 나에게는 큰소리를 내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늘 크고 든든한 울타리였지만, 은퇴한 지 한참 후까지 의과대학에 다니는 막내아들을 뒷바라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등록금을 내야 할 때가 되면 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다.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내게 당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표현한 적은 없었고, 내가 우연히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학 등록금 때문에 고민하는 대화를 듣고서야 알게 됐다. 그 후 나는 군대에서 주는 장학금을 신청했고, 그 덕분에 남보다 4년 더 군의관 생활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중령으로 전역한 후 피부과를 개원했을 때 이미 이 세상을 떠나셨다. 남들처럼 편하게 공부시키지 못하고 군 장학금 때문에 군 생활을 남보다 더 해야 하는 나를 보고 항상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던 시절에는 군 생활하면서 받는 월급만으로 두 아이를 낳고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께 용돈도 충분히 드리지 못했다.

노년에 당뇨 때문에 약을 계속 복용하셨고, 당뇨 후유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들을 힘들거나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애쓰셨던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남은 호흡을 모두 다하시고 잠을 주무시듯이 편안하게 이 세상을 떠나셨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라’고 한 아버지의 말씀은 지금까지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삶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서인지 나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실하고 열심히 가정과 병원 일에 충실하고 있다.

최신 기기들을 들여와 치료에 적용할 때마다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부작용을 염려해 늘 나와 내 가족에게 먼저 사용해 보고 확신이 들 때만 환자들에게 사용했다. 그 덕분에 내 몸은 물론 아내와 장모님, 그리고 아들과 딸의 손등·팔·다리에는 군데군데 훈장처럼 흉터가 남아 있다.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성실하게 살아오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삶이 내 삶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붉어진다.

신학철 신학철피부과 원장

약력 : 1954년생. 한양대 의과대학 석사 및 박사.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그는 병원 진료와 의료 봉사 활동을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으며 1997년부터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자 무료 진료를 계속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