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성공 DNA ‘발분저서’ 정신
“후세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춘추’에 의해서일 것이다. 후세에 나를 죄 주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영화 ‘공자’는 이 대사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분수가 샘솟는 정원을 배경으로 공자(저우룬파 분)는 회한에 찬 표정과 함께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공자의 예언처럼 후세 사람들은 ‘춘추’를 통해 그를 부활시켰고 또 ‘춘추’를 통해 그를 벌주었다. 공자는 중국 공산혁명과 또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때 두 번이나 죽임을 당했다. 공자가 말한 그 ‘춘추’로 인해 구체제의 옹호자로 매도당하며 가차 없이 처단을 당한 것이다.먼저 공자의 직계 후손은 공산혁명 때 고향인 취푸(曲阜)를 떠나야만 했다. 공자의 직계 후손들이 지금까지 취푸가 아닌 대만에 살고 있는 이유다. 또한 취푸에 있는 공자의 저택과 유적지, 문화재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로부터 훼손당했다. 심지어 공자의 묘까지 파헤칠 위기에서 간신히 화를 면하기도 했다.공산당 정권에 의해 두 번 죽임을 당한 공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다시 그 공산당 정권에 의해 부활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추진하고 있는 중국 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중국문화원의 별칭인 ‘공자학원’이 바로 그것이다. 2004년 말부터 중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보급하는 공자학원 100여 개를 설립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최근에는 저우룬파 주연의 영화 ‘공자’의 흥행 성공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심지어 중국 정부는 미국 영화 ‘아바타’가 전 세계적인 흥행 성공에 힘입어 중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아바타’ 상영 금지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는 영화 ‘공자’의 흥행 성공을 위한 고육책이라는 설도 무성하다. 그런데 영화 ‘공자’의 흥행이 저조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직은 ‘공자 열풍’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영화 ‘공자’가 남성(주로 40대 이상) 취향의 영화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영화 ‘공자’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가 다시 중국 정부 주도(?)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런데 공자의 삶은 어쩌면 고난의 연속이었던 중국 공산혁명의 과정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공산혁명 세력은 1934년 국민당 군대에 밀려 10만 명이 대장정에 올라 9600km를 걸어야만 했는데 1년 후 살아남은 이들은 불과 7000~8000명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14년 후에 결국 공산혁명에 성공했다.공자의 삶은 어쩌면 대장정만큼 가혹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공자는 무려 54세 때 제자들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 14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유랑해야 했다. 더욱이 그 여행길은 정적에 의해 강요된 것이어서 자신의 의지대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인간 공자’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아닐까. 누구라도 공자처럼 14년이 아니더라도 1년, 아니 몇 달만 여행을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기백,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도전정신은 가난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속에 혼자의 힘으로 학문에 정진하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공자의 아버지는 몰락한 하급 군인이었는데 무려 예순네 살 때 공자를 얻었다. 더욱이 어머니는 열일곱 살로 세 번째 부인이었다. 공자는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 출신으로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공자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공자가 열일곱 살 때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고아 신세가 됐다. 공자는 “나는 어린 시절 가난하고 비천하여 먹고살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많이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공자는 젊은 시절 가축 관리를 하는 말단 공무원도 지냈다.공자는 법무장관과 재상에까지 오르지만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공자가 14년의 유랑 생활을 끝내고 노나라 도성의 북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68세였다.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오면서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 여생은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정치할 그릇이 아니다”고 독백한다. 이는 그가 14년 동안 여행을 하며 얻은 결론이었다. 이후 공자는 스승의 삶과 저술에 전념하면서 ‘시경’과 ‘서경’, ‘춘추’ 등 육경을 편찬했다. 서자, 즉 첩의 아들로 태어났던 공자는 마침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이상을 글을 통해 이룬 것이다.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대부분 ‘걸작’은 가난한 무명 시절에 나온다고 한다. 그는 명예와 돈은 같은 부대에 들어가지 못한다며 돈 때문에 글을 쓰는 작가는 파멸한다고 했다. ‘사기’를 쓴 사마천은 곤경과 가난의 한이 사람을 분발하게 하고 걸작을 만드는데 이를 ‘발분저서(發憤著書)’라고 표현했다. 곤액을 당하고 가난한 시절에 마음을 굳세게 하면 역작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마천 자신도 그랬다. “옛날 서백창(주나라를 창건한 무왕의 아버지)은 유리에 갇히게 되자 ‘주역’을 풀이했으며,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경을 당하자 ‘춘추’를 지었다. 초나라의 굴원 또한 추방당한 몸이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실명한 후에 ‘국어(춘추시대 8국의 역사를 나라별로 적은 책)’를 남겼다. 손빈은 다리를 잘리는 형을 받은 후 ‘병법’을 저술했고, 여불위는 촉으로 유배된 후에 ‘여씨춘추’를 남겼다. 이들은 모두 마음에 깊이 맺힌 바가 있으나 그 뜻을 직접 표현할 수 없었기에 지나간 사실을 빌려 미래에 그 뜻을 전했던 것이다.”발분저서는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없을 때 옛날 일들을 기록하고 미래에 희망을 얻기 위해 글로 남기는 것’이다. 이는 사마천이 쓴 ‘사기’에서 사마천 자신의 자서전 격인 ‘태사공 자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마천은 “나도 그들의 마음과 똑같았다”고 토로했다.사마천은 마흔여덟 살에 흉노족에 포로로 잡힌 이릉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황제(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을 당했다. 궁형은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것으로 고대 중국에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궁형을 당하면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사마천은 살아남아 아버지 사마담이 쓰다 남은 ‘사기’를 저술하는데 전념해 쉰다섯 살에 완성했다.우리나라에서 ‘발분저서’로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들 수 있다. ‘열하일기’는 가난을 달관하다시피 한 40대 후반에 나왔다. 가족들이 굶기를 밥 먹듯이 해 연암은 급기야 쉰 살에 9급 공무원의 길로 나가는 굴욕을 감수한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그가 공무원이 된 이듬해 세상을 떠난다. 연암이 공직자로 있을 때에는 생활이 안정되어서인지 ‘발분저서’가 나오지 못했다. 다산은 18년이 넘는 유배지 생활 동안 ‘목민심서’를 비롯해 500권이 되는 책을 지었다. 또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 역시 발분저서라고 할 수 있다. ‘군주론’으로 유명한 니콜로 마키아벨리도 당시 피렌체의 왕이 된 메디치에게 거듭 공직을 줄 것을 요청했지만 좌절되자 절치부심하고 쓴 책이다.진정 역사에서 성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사기’를 보면 사마천은 공자의 성공을 이렇게 말한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부유했다. 공자의 제자 중 원헌 같은 이는 비자나 쌀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뒷골목에서 숨어 살았다.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호위병들을 거느리며 제후들과 교제했다. 제후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제후의 예로 그를 맞이했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것도 그가 스승을 모시고 다녔기 때문이다.”문득 “리더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추종자를 거느린 사람이다”고 말한 피터 드러커의 말이 떠오른다. 공자의 삶이 다시 중국에서 부활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자공처럼 부자가 된 중국 정부가 ‘제자’를 자처하고 있다.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