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시동 건 안경 산업

한때 세계 4대 안경 집산지로 이름을 떨치던 대구 3공단. 지난해 조성된 1.1km의 안경거리(침산교~노원네거리) 주변으로 300개가 넘는 안경 부품·조립 업체들이 촘촘히 밀집해 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안경테의 90% 이상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안경은 겉보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금형에서부터 가공과 용접, 도금, 연마에 이르기까지 260개에 달하는 공정을 차례로 거쳐야만 완성품이 나오는 정밀 가공 제품이다. 게다가 자동화가 불가능한 공정이 많아 수작업 비중이 매우 높은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꼽힌다. 하청·협력업체들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대구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특정 지역 중심의 안경 집산지가 일찍부터 발달해 왔다. 이탈리아 벨루노와 일본 후쿠이, 프랑스 리옹, 중국 선전과 원저우 등이 대표적이며, 사실상 이들이 세계 안경 시장을 이끌어 간다.3공단 안경 업체들은 소규모 가내수공업 형태가 대부분이다. 좁은 임대 공장에서 직원 2~3명과 함께 사장이 직접 안경 부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하나하나 손으로 다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아시아 최대 안경기업’으로 불린 삼성광학은 종업원만 2500명이 넘었다. 이 회사는 플라스틱 안경테를 대량 생산해 1주일에도 십여 차례씩 수출 컨테이너에 가득채워 실어 날랐다. 안경테를 12개씩 묶어 5~6달러에 납품하던 시절이다. 월급날이면 3공단 주변 식당가는 밤새도록 떠들썩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중국의 부상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해외 바이어들의 ‘오더’가 어느 날 뚝 끊긴 것이다. 안경 산업 쇠락의 신호탄이었다.과거 한 블록 전체를 차지했던 삼성광학의 화려했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쪽 모퉁이 4층 건물에 ‘삼성광학’이란 간판을 내건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안경 산업을 호령하던 삼성광학 김지환 회장은 수년 전 자동차 부품으로 업종을 전환해 안경 업계를 아예 떠나버렸다. 더 이상 안경 산업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위기가 시작된 곳은 삼성광학만이 아니었다. 3공단 안경 업체들은 수출만 해온 곳이 태반이었다. 바이어의 주문에 맞춰 제품을 만들어 제때 납품하면 그만인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OEM)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것이다. 주문이 끊기자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됐다. 일부는 중국으로 공장을 옮겼고, 몇몇은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내수시장을 겨냥했다.이흥우(54) KNC 옵티컬 사장은 32년 전 안경 업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베테랑이다. 스포츠용 특수 안경 업체를 창업해 한때 큰돈도 벌었다.“1980년대에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저절로 들어왔지요. 해외에서 주문이 계속 밀려왔어요. 위기를 실감한 것은 1990년대 중반쯤부터죠. 비철금속 원자재 값이 크게 뛰었는데 바이어들은 납품 가격을 절대 올려주지 않아요. 대신 중국으로 가버리죠. 돈을 벌 때는 그런 시절이 평생 계속될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게 아쉽죠.” 이 사장도 고민 끝에 1996년 중국 원저우로 공장을 옮겼다.곧이어 또 한 번 위기가 닥쳤다. 이번에는 중국이 아니라 룩소티카, 사필로 등 이탈리아 안경그룹들이 진원지였다. 이들은 1990년 말 이탈리아와 프랑스 명품 브랜드들을 거의 싹쓸이하며 독점 라이선스를 맺었다. 룩소티카는 불가리·버버리·샤넬·돌체&가바나·티파니·베르사체·프라다 등 명품 브랜드를 단 안경을 내놓기 시작했다. 안경 시장에 초강력 ‘명품 태풍’이 상륙한 것이다. 룩소티카는 현재 매출 8조 원, 순이익 6200억 원대(2008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반면 국내 안경 업체들은 중국 저가품과 명품 브랜드 사이에서 고사 직전으로 내몰렸다.하지만 줄곧 내리막길을 걷던 대구 안경업계에 최근 새로운 희망이 찾아들고있다. 지난 1995년 2억5000만 달러로 정점을 찍은 이후 매년 뒷걸음질하던 안경테 수출액이 2008년(0.4%)과 2009년(4%) 2년 연속 플러스 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12년 만에 이룬 극적인 반전이다. 가장 큰 변화는 중국으로 돌아섰던 해외 바이어들이 다시 대구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위안화 강세, 노동법 강화 등으로 중국의 이점이 크게 줄면서 손재주와 품질이 뛰어난 한국의 매력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안경 산업의 부활’을 위해 절치부심해 온 안경 업체들의 노력도 수출 증가세 전환에 한몫했다는 평가다. 국내 업체들은 꾸준한 제품 개발을 통해 가격에 민감한 미국에서 품질과 디자인을 중시하는 유럽·일본으로 주력 수출 시장을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요즘 한국산 안경테는 티타늄 제품의 경우 20달러 이상에 팔려 나간다. 20년전 12개 한 묶음에 4~5달러를 받던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이 사장은 “과거처럼 가격경쟁을 하는 구조로는 희망이 없다”며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2003년 중국 공장을 정리하고 대구로 돌아온 그는 지난해 TR90 소재를 사용한 ‘E-FLEX’ 안경을 개발했다. TR90은 심장 수술에도 사용되는 특수 플라스틱으로 탄력성이 좋아 부러지지 않고 얼굴을 감싸는 인체공학적 디자인도 가능하지만 가공을 위해서는 고도의 사출 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젊은 안경 업체 ALO는 제품 기획에서부터 생산과 판매까지 모두 아우르는 ‘패스트 패션(SPA)’에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경우다. 이세현(42) ALO 상품본부장은 “대구 안경 업체들의 기술력과 새로운 신소재, ALO의 마케팅 능력을 결합하면 충분히 안경 산업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 수 있다”고 자신했다. 지난해 문을 연 ALO 서울 명동 중앙로점은 설치 미술가와 비디오 아티스트 등이 참여해 소비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독특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ALO는 100% 국내 안경 업체의 자체 브랜드 제품만을 판매한다.안경 디자인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수제 안경 공방 ‘얼굴에 선을 긋다’ 황순찬(34) 대표는 지난해 ‘하나’라는 안경 작품으로 세계 3대 디자인상인 ‘레드닷 어워드’를 수상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티타늄의 본래 색깔을 그대로 살린 그의 작품들은 100만~300만 원대에 판매되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작품 특성은 살리면서 가격을 낮춰 대중화한 상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황 대표는 “‘얼굴에 선을 긋다’를 세계적 브랜드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손진영 한국안경산업지원센터 센터장의 전망은 훨씬 낙관적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안경 착용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고 중국에서 안경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이라며 “안경은 사양산업이 아니라 영원한 성장산업”이라고 잘라 말했다.대구=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