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불거진 글로벌 금융 위기의 근본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와 있지만 ‘미국 제조업 붕괴론’ 만큼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 요약하자면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미국 제조업의 몰락이 이번 금융 위기를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 주장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원가와 생산성·품질 등 모든 면에서 밀리면서 수출은 줄고 수입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중국 등 신흥경제국에서 생산한 더 값싸고, 더 품질 좋은 제품들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엄청난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적자로 이어졌다. 미국은 이런 만성적인 적자 구조를 달러 유동성 확대와 금융 산업의 경쟁력 우위로 그동안 버텨왔다는 설명이다. 미국이 마구 찍어낸 달러는 부동산 시장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버블을 키웠으며 그것이 한계에 달하면서 터져버린 것이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튼튼한 제조업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 기반 위에서만 금융 등 서비스업도 경쟁력을 잃지 않고 지속 가능한 성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도 이제 제조업의 지원이라는 본래 역할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뼈아픈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제조업의 서비스화’, ‘탈산업화’, ‘서비스업 육성’ 등 그동안 국내에서 제조업의 쇠퇴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경제발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논의 대상을 안경이나 섬유·신발·가죽 등 흔히 경공업으로 불리는 전통 제조업 분야로 좁히면 이는 거의 운명론이 된다.

하지만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기간산업실장은 “상당수 선진국들에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전통 제조업이 쇠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전통 제조업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6%에서 2006년 4%로 크게 하락했다. 그러면 다른 선진국들은 어떨까. 놀랍게도 1995년 프랑스의 전통 제조업 수출 비중은 5%로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 이탈리아의 전통 제조업 수출 비중은 이보다 훨씬 높은 13%에 달한다. 전통 제조업의 쇠퇴가 선진국 진입의 필수 조건은 아닌 셈이다.

주 실장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통점은 의류·가방·패션 등에서 유명 브랜드를 많이 갖고 있다는 점”이라고 분석했다. 좋은 브랜드만 있다면 전통 제조업도 얼마든지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금융·IT가 제조업 대체할 수 없어

또한 전통 제조업 자체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빨간 등산 양말이 등산복 패션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요즘은 산에 가면 등산복과 등산화는 필수고 기능성 소재로 만든 고가의 유명 브랜드 제품을 걸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아토피 등 환경성 피부 질환이 문제가 되면서 합성섬유보다 친환경 ‘오가닉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경제가 발전하고 삶의 질의 중요해지면서 전통 제조업 시장은 오히려 점점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에몬 핑클톤이 쓴 ‘제조업이 나라를 살린다’는 또 다른 측면에서 제조업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정보기술(IT) 붐이 한창이던 1999년 나온 이 책은 “미래 경제의 가장 유망한 산업은 제조업”이라고 강조했다.

핑클톤은 당시 각광받던 IT 산업은 고용 밸런스의 문제, 소득 신장의 둔화, 수출 경쟁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IT 산업은 일반 제조업과 달리 고학력 엘리트들을 주로 채용하는 고용 패턴을 갖기 때문에 수많은 노동 인력을 감당해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을 창출해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제조업과 대조적으로 IT 산업은 실업자를 양산해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IT 산업은 소득 증대와 수출에도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핑클톤은 IT 산업에 치중하는 미국의 소득 신장률은 제조업을 중시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IT 산업이 인터넷·소프트웨어·금융 등 지식재산권과 연관해 수출이 쉽지 않은 분야가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서비스업에 대한 과도한 기대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핑클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서비스업이 제조업보다 생산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서비스업의 1인당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지 생산성 자체의 크기가 제조업보다 크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서비스업의 고용 창출력이 제조업보다 뛰어나다는 논리에 근거해 서비스업 육성 정책이 수년째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문제가 될 만큼 국내 서비스업이 비중이 지나치게 낮고 제조업 비중은 지나치게 높은 것일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 달러인 시점을 기본으로 하면 독일과 일본의 제조업 고용 비중은 각각 28.4%(1991년), 22.9%(1988년)였지만 한국은 18.0%(2006년)에 불과했다. 오히려 제조업 강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와야 할 정도다.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