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콜당한 모노즈쿠리 자존심

“소비자들에게 불편을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 중이던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아키오(53) 사장은 지난 1월 29일 대규모 리콜(회수 후 무상 수리) 사태와 관련해 공식 사과했다. 그는 일본 NHK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의 우려를 가능한 한 빨리 없앨 수 있도록 설명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같은 날 도요타는 유럽에서 최대 180만 대의 차량을 리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리콜 대상은 소형 승용차인 코롤라·아이큐·야리스 등 유럽에서 판매 중인 8개 모델이다. 가속페달 결함으로 미국과 중국 등에서 8개 차종 580만 대를 리콜한데 이어 터져 나온 리콜이다. 도요타의 리콜 대상은 총 760만 대로 2009년 이 회사의 전 세계 판매량(698만 대)을 넘어섰다.‘품질 신화의 자부심’으로 세계 자동차 업계 1위를 지켜 온 도요타자동차가 대규모 리콜에 휘말려 그동안 쌓아 온 아성이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 도요타가 리콜을 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일부 차종에서 가속페달을 밟았다가 발을 떼어도 가속페달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문제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작년 8월 미국에서 과속 사고가 발생해 일가족 4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도요타는 당시 가속페달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운전석 바닥 매트에 가속페달이 걸려 그럴 수 있다며 운전석 매트를 걷으면 된다고 해명했다.그러나 운전석 매트를 걷었는데도 이런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마침내 가속페달 부품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인정했다. 문제는 이 가속페달을 만든 회사가 도요타가 아니라 미국의 CTS라는 부품 회사란 점이다. 도요타는 리콜 사태 후 책임을 CTS사 쪽으로 돌리면서 나중에 리콜 비용을 청구하겠다는 얘기도 한다. 하지만 CTS사는 도요타 자동차의 가속페달 문제는 자기 회사가 부품을 납품하기 이전에도 발생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부품에는 이상이 없다는 입장이다.구체적인 책임이 어디에 있든 도요타가 대규모 리콜 사태에 휘말린 것은 무분별한 글로벌 확장 전략의 그늘이라는 분석이 많다.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서의 판매 확대를 위해 생산 공장을 급속히 늘리면서 ‘도요타다운 품질’이 유지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도요타는 2001~07년 중 자동차 생산을 334만 대 늘렸다. 자동차 공장의 생산 대수가 보통 연간 30만 대인 점을 감안하면 6년간 공장 11개, 1년엔 거의 2개씩 늘린 셈이다. 대부분 해외 공장이었다. 이들 해외 공장에선 비용 절감을 위해 상당수 부품을 현지 조달했다. 여기서 품질관리에 구멍이 뚫렸다. 이번에 리콜 대상이 된 자동차는 모두 해외에서 생산된 것이다. 도요타 관계자는 “일본에서와 달리 외국 부품 업체에 도요타식 품질관리 시스템인 ‘가이젠(개선)’을 철저히 요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고 고백했다.결국 전임 사장인 와타나베 가쓰아키의 확장 일변도 경영 정책에 따른 후유증이란 지적이다. 그 부담은 작년 6월 사장에 취임한 창업자의 증손자 도요다 아키오 사장이 짊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도요다 사장이 위기 극복의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다.도요타 역사상 14년 만에 창업 가문 출신으로 사장에 오른 도요다 사장은 세계경제 위기로 적자 수렁에 빠진 도요타를 건져낼 구세주로 평가 받았다. 도요타의 조 후지오 회장은 “도요타가 처한 경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발상과 시각·리더십이 필요하다”며 “도요다 사장은 창업가 직계로 도요타 그룹의 구심력을 높여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능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대규모 리콜 사태가 터지면서 궁지에 몰린 셈이다.일본 재계연구소의 무라타 히로후미 사장은 “창업가 출신인 도요다 사장이 경영권을 승계했을 땐 도요타 실적이 바닥을 치고 회복세를 보여 그에게 힘이 실리는 시나리오를 예상했다”며 “그러나 예상 밖의 리콜 사태로 그의 경영 능력이 새로운 시험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 일본말에서 ‘모노즈쿠리(物作り)’는 직역하면 ‘물건 만들기’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물건 제조’의 의미가 아니다. 작은 손톱깎이 하나를 만들더라도 장인의 혼을 담아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장인정신’이란 말로 의역되는 이유다. 이 말이야말로 일본 제조업의 자존심이었다.그러나 최근 일본의 모노즈쿠리가 흔들리고 있다. 장기 불황과 내수 침체의 파고를 넘는 과정에서 일본 제품 특유의 모노즈쿠리 요소가 희박해졌다. 도요타의 대규모 리콜 사태가 상징적 사례다. 도요타의 리콜 사태는 세계 최강으로 인식됐던 일본 제조업의 이미지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전문가들은 일본 제조 기업의 모노즈쿠리가 무너진 것은 경기 침체에 따른 과도한 비용 절감과 치열해진 글로벌 경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비용 절감을 위해 과도하게 허리띠를 졸라맸고 내수 축소를 이기기 위해 해외 공장을 크게 늘린 것이 품질 악화라는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것이다.게다가 글로벌 기업으로 급속히 성장한 뒤 자신의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채 ‘대마불사’라는 믿음에 우쭐댔던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일본 만큼 좋은 품질의 제품을 더 싸게 생산할 수 있는 한국·중국 등 아시아 경쟁국들도 출현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분석이다. 소니의 경우가 그랬다. 소니는 1980년대 ‘워크맨’이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이후 디지털 플레이어 생산 등 여러 차례의 국면 전환에서 판단을 그르치는 바람에 애플이나 삼성 같은 경쟁사에 뒤처지게 됐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제품에 대한 불만과 리콜이 최근 수년 사이 급격히 늘었다. 일본 국토교통성에 따르면 지난 2004~08년 5년 동안 일본 국내 차 리콜 건수는 앞선 5년(2000~04년)에 비해 2배로 급증했다. 또 자동차·식품·약품을 제외한 제품의 안전과 관련된 리콜 건수는 2009년 189건에 달했다. 3년 전에 비해 무려 80% 증가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기업들이 제품으로 발생한 모든 사고를 10일 내에 보고하도록 한 새로운 법을 2007년 도입하기도 했다. 2007년 이전엔 제품 관련 사고 공개는 회사의 재량이었다.물론 일본 기업 경영자들은 모노즈쿠리를 아직도 일본 경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프린터·카메라 제조업체 리코의 사쿠라이 마사미쓰 회장은 “일본이 모노즈쿠리 정신을 버리고 다른 길을 걷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치열해져가는 글로벌 경쟁 속에서 일본의 모노즈쿠리가 앞으로 어떻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상당수 일본 기업인들이 고민하고 있다.차병석 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