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승리와 스티브 잡스의 후계자

= 지난 1월 31일 미국 LA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제52회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장. 이날 사회자로 나선 코미디언 스테판 콜버트는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수상곡을 소개할 때 독특한 세리머니(ceremony)로 청중의 시선을 잡아끌었다.봉투에서 메모지를 꺼내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수상자 이름을 발표하는 대신 상의 안주머니에서 아이패드(iPad)를 꺼내 든 것. 아이패드는 불과 나흘 전 애플사가 공개한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다. 콜버트는 슬림하면서도 작고 빛나는 이 컴퓨터를 앞뒤로 흔들어 보이면서 시상식에 참석한 자신의 딸에게 한마디 던진다. “이런 최신 제품을 사용하니 아빠가 더 멋져(cool) 보이지 않니?” = 지난 2월 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더램의 사우스포인트몰에 있는 애플 스토어(애플사가 직영으로 운영하는 컴퓨터·이동통신기기 점포). 전날 이 지역을 강타한 기록적인 폭설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아이패드의 기능과 출시 날짜를 묻기 위해 점포를 방문한 수많은 고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의 가장 큰 관심은 언제면 아이패드를 구입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점원인 아이린 스티브(21) 씨는 “여러 가지 사정상 3월 말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또다시 전 세계 정보기술(IT) 업계를 발칵 뒤집었다. 지난 1월 27일 그가 평판형(tablet) 컴퓨터인 아이패드를 공개하자 언론은 물론이고 컴퓨터 마니아들, 소비자들 사이에서 신제품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아이패드는 9.7인치 터치스크린을 장착한 두께 1.27cm, 무게 680g의 슬림형 평판 컴퓨터로 게임·영화·음악·전자책(e북)은 물론 인터넷 검색과 이동통신까지 가능한 복합 정보통신 기기다. 카메라 기능 정도만 빼면 기존 휴대전화와 휴대용 컴퓨터에서 지원되는 대부분의 기능이 구현된다고 보면 된다. = 이 제품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업계에 대한 파급효과 때문이다. 잡스가 내놓은 작품들은 그동안 모두 대히트를 쳤다. 잡스가 1997년 애플로 복귀해 10여 년 동안 출시한 제품들, 예컨대 매킨토시 컴퓨터(iMac)와 MP3 플레이어(iPod), 휴대전화(iPhone) 등은 모두 각 분야에서 시장을 석권했다. 기존 업체들에 애플의 신제품은 위협적이지 않을 수 없다.특히 새 제품은 복합적 기능을 가진데다 499~899달러라는 싼값에 출시될 예정이어서 통신 업계와 컴퓨터 업계는 물론 출판·미디어 업계 전체가 초긴장하며 그 성공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이 때문에 이번에도 제품 공개 한 달 전부터 신문·방송·인터넷은 온통 잡스가 새로 내놓을 제품에 대한 추측과 파급효과 등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었다.일단 제품이 발표되자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일부에선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존 휴대전화인 아이폰의 사이즈만 키워 놓은 것에 불과하며 혀를 내두를 만한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휴대용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경계를 허문 차세대 이동통신 및 컴퓨터 시장의 표준이 될 만한 혁신적 제품이라는 극찬이 나온다.이런 평가들이 좀 성급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제품이 본격적으로 출시되는 3월 말이면 자연스럽게 성공 여부가 검증될 텐데 벌써부터 입 아프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의 기저에는 아이폰과 아이팟이 처음 출시됐을 때도 부정적인 전망이 많았다며 ‘두고 보라(wait and see)’는 식의 낙관론이 깔려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이패드가 성공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의견이 많은 듯하다. = 제품의 시장성에 대한 전망을 제외하고 현지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논쟁과 전망들 속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크게 두 가지 정도다. 우선 이번 아이패드 공개를 계기로 애플사의 독특한 ‘엘리트 전략’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과 애플의 후계 구도에 대한 조심스러운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월 31일자에서 ‘스티브 잡스와 엘리트 경제학(Steve Jobs and the Economics of Elitism)’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철저한 엘리트주의와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잡스의 경영 철학이 21세기 기업의 성공 신화를 다시 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터넷 시대의 시대정신은 ‘집단지성’과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통하고 있지만 잡스는 정반대의 길을 주창해 애플을 성공 가도로 올려놓았다는 것.잡스가 3만5000명의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다르게 사고하기(think different)’다. 그는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할 때 집단적인 의견을 참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작품은 위원회나 시장조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집과 인내, 신념과 직관에 의한 것”이라고 전했다.잡스는 실제 직관과 개인적 기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위대한 제품은 기호의 승리이며 기호는 공부와 관찰, 그리고 인간이 만든 최고의 것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그것을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접목하는 문화에 젖을 때 나온다”고 정의했다.언론들은 그의 직관 능력과 관련, 잡스가 컴퓨터 업계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제품의 개발 방향과 출시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마케팅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미 경제 주간지인 타임(TIME)은 그의 동물적인 마케팅 능력과 관련, 잡스가 아이패드의 공개 시점을 경쟁 업체인 구글의 신제품(스마트폰인 넥서스원) 출시 직후로 잡아 넥서스원을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도록 한 점을 뽑았다.그는 엘리트주의와 관련, 이런 직관적인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중요시한다. 잡스는 “정말 탁월한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및 매니저는 그냥 10%, 20% 혹은 30% 뛰어난 것이 아니고 그냥 뛰어난 사람보다 10배 더 뛰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핵심 팀원을 고를 때 우수성을 배가할 수 있는 인재를 선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 문제는 이런 애플의 성공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잡스가 언제까지 애플을 경영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잡스 없는 애플의 성공이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CNN머니는 “스티브 잡스는 곧 애플이고 애플은 곧 스티브 잡스”라고 보도했다. 잡스는 애플을 창업했고 애플의 성공을 주도해 왔다. 잡스는 비전 제시에서부터 사소한 제품 개발 단계까지 곳곳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는 제품 광고 카피에 들어가는 문구에 대해서도 “4번째 문단에 3번째 단어는 적당하지 않다. 좀 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라”는 식으로 꼬치꼬치 지시한다는 것. 애플과 몇몇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던 컨설턴트 켄 시걸 씨는 “잡스는 일반적으로 CEO가 관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많은 일에 참여하고 있다”며 “그는 큰 그림과 세부적인 사항을 함께 챙길 수 있는 드문 경영자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뉴스위크는 잡스가 이미 4∼5년 전에 췌장암으로 쓰러졌으며 지난해에는 다시 수술을 받았다는 점을 보도하면서 그의 건강 문제와 후계 구도를 조심스럽게 거론했다.잡지는 누가 후계자로 거론되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9월 잡스가 6개월의 병가에서 돌아와 공식 석상에 섰을 때 정확히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의 부재 기간 동안 애플을 무사하게 이끌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는 전했다. 주인공은 애플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Tim Cook)이다. ‘잡스=애플’이라는 공식이 통용되는 상황에서 잡스 없이 반 년 동안 회사를 별 탈 없이 운영했다는 것은 그가 일단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갖췄다는 얘기로 해석될 수 있다.그러나 잡스의 복귀 이후 애플 후계자 문제에 대한 얘기들은 일단 사그라졌다. 애플은 CEO의 신변 문제나 인사 문제 등에 대해서는 공식 발표를 빼고는 외부 공개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다. 따라서 잡스의 당시 발언이 단순한 감사의 표시인지, 아니면 후계 구도와 관련된 일종의 암시인지 짐작하기 힘들다.잡스의 친구이자 사무용 소프트웨어 업체인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 회장은 “잡스는 대체 불가능한(irreplaceable) 천재적 경영자”라면서 “그가 떠난다면 회사는 곧 그의 빈자리를 대단히 아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뉴스위크는 현재 53세인 잡스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인다면서 언제, 누가 잡스의 후계자가 되든 그의 빈자리를 채우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박수진 한국경제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