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의 삶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그리고 세상을 배워왔다. 그것은 허리가 잘려도 계속 몸을 키워 올라오는 들풀의 끈질긴 생명력이었다.아버지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과 가족의 애환을 그린 장편소설의 주인공’만큼 힘겹고 감동적인 인생을 사셨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가슴에 희망도 키운다.아버지는 열넷,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여의셨다. 어린 나이 때문에 남겨진 재산은 친척들의 싸우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고 독자였던 아버지는 기댈 언덕도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성실함을 밑천으로 차곡차곡 논밭과 외양간을 조금씩 넓히셨다.여름이면 양지바른 밭에 수박과 참외를 길렀다. 아버지는 저녁에 서리꾼으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원두막으로 향했고 나는 마치 경찰관이 된 것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 아버지 뒤를 따르곤 했다. 늘 서리꾼들은 나보다 머리 두세 개 더 큰 학생들이었지만 아버지가 옆에 계시니 문제될 게 없었다.아버지는 원두막 초롱불 밑에서 곡절 많은 가족사에서부터 경험담, 그리고 인생의 마음가짐까지 많은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사람은 다 자기 복을 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는 그 복을 다 찾아먹지만 누구는 자기 복을 발로 차기도 한다. 다 자기하기 나름인 법이다.” 나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아버지 얘기를 듣다가 밤하늘의 별과 함께 잠들곤 했다.1980년대 초, 소 값 파동이 나면서 살림이 기울었다. 우시장에서 거래되던 소 값은 홍시가 떨어지듯 곤두박질쳤고 농부들이 인기 작물에 몰려든 탓에 농작물 시세마저 주저앉았다. 그리고 1983년 여름, 바지랑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무렵이었다. 아랫집 아재가 황급히 마당 안으로 뛰어오며 소리쳤다. “아야 현창아! 큰일 났다. 빨리 아버지 모시고 병원부터 가야쓰것다!” 아버지는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길에 쓰러지셨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아버지의 병원 출입은 피를 토하는 횟수만큼 반복되었다.1988년 우리 가족은 서울 변두리로 이사했다. 외진 남도에서 아버지를 치료하는 것은 무리였고 더 이상 농사를 지을 형편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병마를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여위고 까만 얼굴에 여유와 미소를 보이려 애쓰셨고 술과 담배를 끊으신 것은 물론이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뒷산을 오르셨다. 그런 노력 덕에 아버지 얼굴에 점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길어야 2년’이라는 진단이 무색할 만큼 회복하신 아버지는 이후 1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시고 은퇴하셨다.지난 연말 가족들과 조촐한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지난 경험을 고백하셨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이 되기도 하고 흉이 되기도 하는 것인디, 아프다고 방 안에만 누워 있고 얼굴에 죽을상만 쓰고 있으면 오던 복도 달아나지 않겄냐. 다 자기 맘먹기 나름이제”라고.아버지는 새봄을 애타게 기다리신다. 아파트에서 한적한 동네로 이사한 후 텃밭 가꾸기에 빠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생 그렇게 해 오신 것처럼 올봄에도 부지런히 아침 해를 맞을 것이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볼 수 있다는 신념을 또 몸소 보여주실 것이다. 직접 키우시는 유기농 야채들을 통해서.나는 아버지의 삶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배워왔다. 그것은 허리가 잘려도 계속 몸을 키워 올라오는 들풀의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1999년에 조그만 인터넷 기업에 합류해 10년을 넘게 한 회사에서 여러 고비를 넘겨 왔던 힘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인생의 기쁨은 추억이 절반이라고 했던가. 별과 함께 잠들던 어린 아이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했던 많은 기억들을 추억한다. 그리고 그 추억들을 인생의 기쁨으로 느끼고 있다. 올여름에는 텃밭에 수박과 참외를 심어야겠다. 원두막은 없지만 그 조그만 텃밭에서 여름밤 하늘을 올려볼 셈이다. 아버지와 함께.1971년생. 97년 동국대 졸업. 2004년 성균관대 경영대학원 졸업. 99년 잡코리아 입사. 2001년 잡코리아 운영이사(현). 2006년 잡코리아 연구개발본부장, 경영인프라지원실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