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 목숨 맡긴 JAL의 망신

파산 위기에 몰린 일본의 간판 항공사 일본항공(JAL)이 1월 19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일본항공은 앞으로 직원의 3분의 1, 자회사의 절반을 잘라내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새로운 항공사로 다시 태어난다는 계획이다.일본 정부는 일본항공의 법정관리 신청 후 “일본항공의 재생을 위해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외국 정부의 이해와 협력을 얻는 등 필요한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일본항공은 강력한 구조조정 등 경영 정상화 작업에 본격 돌입했다.일본의 대형 항공사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법원이 회사갱생법을 적용하면 공적 기관인 기업재생지원기구가 관재인으로 선정돼 경영 정상화를 주도한다. 기업재생지원기구는 3월 하순까지 일본항공의 채무 구조조정 방안을 확정하고 7월까지 경영 정상화 계획을 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 정상화 계획은 8월 중 확정될 예정이다. 이어 9월에 완전 감자(100% 주식 소각)와 함께 3000억 엔의 뉴 머니(New Money)가 출자돼 일본항공은 새로운 회사로 재탄생하게 된다.기업재생지원기구는 법정관리 신청에 따라 일본항공의 니시마쓰 하루카 사장 등 대부분의 경영진에 책임을 물어 물러나게 했다. 새로운 JAL의 사령탑은 세계적 전자부품 기업인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78) 명예회장이 맡았다. = 일본항공의 부채 총액은 2조3221억 엔으로 자산보다 부채가 8700억 엔이나 많은 것으로 최근 집계됐다. 자본이 완전 잠식된 것으로 사실상 파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1951년 설립돼 일본을 대표하는 국적 항공사이자 아시아 최대 항공사였던 일본항공이 이렇게 망가진 이유는 무엇일까.사실 일본항공의 법정관리 신청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경영난으로 기업재생기구의 지원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일본항공은 지난 10년간 정부의 구제금융 자금을 3차례나 받았다. 일본항공은 1987년 민영화된 이후 줄곧 어려움을 겪었다. 첫 불운은 1985년에 발생했다. 520명의 목숨을 앗아간 항공기 추락 사고가 발생하면서 일본항공의 명성에 금이 갔다. 일본항공은 실추된 명성을 회복하는데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일본 경제가 1990년대에 주가·집값 폭락으로 말미암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하면서 일본항공은 또 다른 난관에 부닥쳤다. 이후 2001년 9·11 테러와 이라크전, 사스(Sars: 급성호흡기증후군) 발생으로 항공 여행 수요가 위축되면서 경영난이 가중됐다. 결정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시장이 붕괴하면서 왔다. 세계경기 침체로 여행 수요가 감소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종플루가 확산돼 항공 여행 수요가 격감했다.국내선도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본 2위 항공사인 전일본공수(ANA)뿐만 아니라 고속철인 신칸센과의 경쟁이 심화돼 일본항공의 항공기 탑승률은 꾸준히 내려갔다. 일본항공의 국내선 탑승률은 6년 연속 65%를 밑돌았다.항공 수요 감소는 일본항공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항공이 유독 심한 경영난에 빠진 것은 공기업적 방만 경영과 무분별한 공항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항공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국영 항공사로 출발해 1987년 민영화됐다. 그러나 지분상으로만 민영화됐지 정부의 영향력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한 예로 일본항공의 부사장은 국토교통성 관료의 낙하산 자리로 지정돼 있다.또 일본항공은 지방 공항 건설 및 항공 노선 유치와 관련해 지방자치단체와 정치인들의 청탁을 무시하지 못했다. 이용 승객이 적어 적자가 뻔한 데도 국적항공사란 이유로 노선을 유지해야 했다. 이에 따라 적자 노선이 많아지고 누적된 적자는 정부 지원과 은행의 대출로 채우는 악순환을 거듭해 왔다.방만한 연금 지급도 재정 상황을 악화시켰다. 일본항공이 퇴직자들에게 지급하는 기업연금 지급액은 최대 월 48만 엔(약 600만 원)에 달한다. 일본 2위 항공사인 ANA의 31만 엔(약 380만 원)을 크게 웃도는 액수다. 일본 정부는 연금 지급액의 감액을 공적자금 투입 확대 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 일본항공이 법정관리를 신청함에 따라 앞으로 법정관리를 주도할 공적기관인 기업재생지원기구는 일본항공에 대한 대수술에 착수했다.기업재생지원기구는 우선 채권은행 등에 자산을 초과하는 7300억 엔의 부채 탕감을 요구하고 신규로 6000억 엔의 협조 대출을 해주기로 했다. 일본항공은 외부 지원을 받는 대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기업재생지원기구는 일본항공 전체 인력의 3분의 1 수준인 1만5700명을 감원하고 110개사인 자회사도 청산·매각 등을 통해 57개사로 줄이기로 했다. 채산성이 없는 국내외 노선도 대폭 정리한다. 기업재생지원기구는 이런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일본항공을 2013년까지 완전 정상화시킨다는 구상이다.일본항공은 해외 제휴처로부터도 지원을 받을 예정이다. 당장 미국의 아메리칸항공과의 제휴를 포기하고 대신 델타항공과 손잡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항공은 델타항공으로부터 3억 달러 정도의 자금 지원을 약속 받은 상태다. 델타항공은 아시아 시장 진출 확대를 위해 일본항공과의 제휴를 적극 추진해 왔다.그러나 법정관리로 일본항공이 정상화돼 재이륙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노선 조정과 연금 감액 등 내부 문제는 법원이 관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와 업체 간 경쟁은 법정관리로 해결할 수 없다. 또 항공 비즈니스의 특성상 한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기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가 일본항공의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일본항공은 모든 문제를 털어내고 일본 국적 항공사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어쨌든 일본항공의 법정관리로 일본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 팽배했던 ‘대마불사(too big to fail)’에 대한 인식이 사라질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적했다. 그동안 일본 증시의 블루칩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절대 망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지만 사실상 파산을 의미하는 일본항공의 법정관리는 이 같은 기대감을 없앨 것이란 얘기다.일본 기업의 회사채 가치가 하락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나카조라 마나 BNP파리바 애널리스트는 “일본 정부가 더 이상 부실기업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란 인식이 투자자들 사이에 확산되면 일본 기업의 회사채 수익률은 상승(회사채 가격 하락) 압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일본항공의 몰락으로 한국의 대한항공이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일본항공을 이용하던 많은 고객이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다른 항공사로 옮겨갈 것”이라며 “일본항공의 국제노선은 대한항공과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 특히 미주노선이 폐쇄된다면 대한항공의 수혜는 상당히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인천공항은 이미 일본항공의 경영난에 따른 수혜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미국에 거주하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사람들이 본국을 방문할 때 대한항공을 타고 인천공항을 거쳐 가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다. 일본인이 미국 또는 유럽을 방문할 때 대한항공을 이용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항공의 경영 악화에 따른 법정관리가 기업의 신뢰를 떨어뜨려 고객들이 이탈하고 있다는 증거다.차병석 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