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을 갖도록 권유하신 것도 바로 아버지다.다만 나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 시험에 드는 건 안 된다는 말씀을 강조하신 것은 나이를 한두 살 먹으면서 그 의미를 더 절실히 깨닫는다.필자의 아버지는 열네 살에 경상도 ‘깡촌’에서 만주 신경으로 가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 다니다 열여덟 살 때 광복을 맞이했다. 1953년 군목으로 근무를 시작해 1969년에는 공병담당인 비둘기 부대로 월남전 파병 근무까지 하셨다. 필자가 중1 때인 1974년 중령(21년 복무)으로 예편하신 후에는 대구에서 목회자로 헌신해 온, 한마디로 한국 근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사신 분이다.지금은 중풍에 치매를 앓고 있어 발음이 불명확하고 기억도 잘 못하시지만 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신다. 최근에는 병원 의사 선생님을 전도, 축복 기도를 받게 만들기도 하셨다. 얼마 전 서해 교전이 발발했을 때는 평소 TV를 보시더라도 하나도 기억을 못하시는 분이 1주일간 군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실 정도로 아버지의 나라 사랑은 대단하다. 아버지께는 유신 말기인 1979년 군 장교 출신이면서 주일 설교에서 독재 정권의 말로에 대한 설교를 지속적으로 강행할 정도로 강단이 있으셨다. 그래서 경찰들은 늘 아버지의 설교를 녹음하곤 했다.“어설픈 정의감만으로 세상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독재가 타도된 후에 너희들이 꿈꾸는 세상은 무엇이냐. 그리고 너는 그 때 무엇을 할 거냐. 그 생각은 하면서 주장하는 것이냐”라고 타이르시던 때가 필자가 대학 1학년 때다. 이제야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의로움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셨던 것 같다. 독재는 반드시 무너지니 그 다음을 대비하라는 미래를 보는 혜안을 심어주신 분도 바로 아버지다.“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재미로서 알기는 하되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 술과 도박이다.”어느 날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인 필자를 앉혀 놓고 맥주와 고스톱을 가르쳐 주셨다. 월남에서 귀국해 막 대구에 정착했을 때다.“네가 좋아서 한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 자유로운 영혼을 갖도록 권유하신 것도 바로 아버지다. 다만 나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 시험에 드는 건 안 된다는 말씀을 강조하신 것은 나이를 한두 살 먹으면서 의미를 더 절실히 깨닫는다.아버지는 개신교의 문제점 중 하나가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지우고 교인 단합을 해치는 원로 목사 제도라고 강조하셨다. 그 때문에 원로 목사가 되기 3년 전에 스스로 사임하고 후임 담임 목사가 책임 목회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며 5년을 목회자 없는 시골 교회로 가서 무료로 목회를 하셨다.17~18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목회를 하시면서 평생 모은 1억5000만 원을 금융업을 하는 교회 집사에게 맡겼다가 그분이 문제가 되어 감옥에 가면서 돈을 한 푼도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야반도주한 가족을 찾으러 서울로 갔지만 지하 단칸 셋방에 사는 모습을 보고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100만 원을 주고 오신 것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한층 높아만 갔다.평생을 기도로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사신 아버지. 그리고 늘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성경 말씀에 의지해 정의롭게 살아오신 아버지. 나랏돈이라면서 군화를 몇 번이고 기워 신으시고 필요 없는 전등 하나라도 켰다가는 난리가 났고 한겨울에도 보일러조차 잘 켜지 않으실 정도로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어머님에게 모피코트와 자개장롱을 사줄 줄도 아셨던, 멋진 분이기도 하다.목회자는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것이니 너희들이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며 자식들에게 목회자가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신 아버지. 비록 지금 말씀을 잘 못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시지만 곁에 오래 계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내 딸과 아들에게 내 아버지 같은 의미로 인식됐으면 좋겠다. 1983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85년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개발리스와 동양증권에서 근무한 뒤 1999년 국내 최초 인터넷 패션몰인 에이다임을 공동 창업했다. 와인나라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