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주목받는 신흥시장 입체 점검

‘30억 신흥 시장을 잡아라.’ 새해 신흥시장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위기 이후’ 선진국이 세계경제를 주도하던 시대는 끝나고 신흥 개발도상국을 새로운 축으로 한 신경제 질서가 들어설 것이란 전망이다.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이 엄청난 부채와 높은 실업률에 짓눌려 있는 사이 이들은 용수철 같은 탄력으로 세계경제의 희망이 됐다. 이러한 신흥시장의 질주는 새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미래의 경제 대국인 중국·인도·러시아·브라질을 묶어 부르는 ‘브릭스(BRICs)’라는 개념은 이제 일상적인 용어가 됐다. 2001년 골드만삭스의 짐 오닐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이 말을 처음 썼을 때 그것은 먼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 됐다. 브릭스를 포함한 신흥 시장이 위기 이후 세계경제를 이끄는 견인차로 떠오른 것이다.전문가들은 선진국이 앞서 나가면 신흥 개도국들이 뒤를 따르는 지난 수십 년간 유지된 낡은 체제가 글로벌 금융 위기를 계기로 무너졌다고 진단한다. 이제는 거꾸로 신흥국이 주도하고 선진국이 여기에 의존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들은 지난 7년간 축적된 거품을 걷어내려면 최소 몇 년은 더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할 처지다.반면 브릭스 등 신흥시장은 건전한 30억 소비자와 이들이 은행에 쌓아둔 엄청난 저축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가난한 이들이 선진국 소비자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성급한 기대다. 아시아 신흥국의 소비를 모두 합해도 미국 소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흥시장의 소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지역의 소비지출 증가는 미국과 유럽 지역의 감소분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으로 분석된다.2010년에는 신흥시장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줄 여러 이벤트들이 예정돼 있다. 오는 5월 상하이에서 열리는 세계 엑스포는 중국이 글로벌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 있다는 자신감을 과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중국은 이번 행사를 강대국으로 나아가는 여정의 역사적 이정표로 보고 수정궁이 지어졌던 1851년의 런던박람회나 에펠탑이 세워진 1889년 파리박람회에 필적하는 행사로 준비하고 있다. 6월에는 떠오르는 대륙 아프리카의 선두 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수십억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을 월드컵이 열린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는 신흥시장의 맹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브릭스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2009년 6월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첫 회의가 열린 뒤 두 번째다. 달라진 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발언권을 모색하는 신흥국들의 자각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 올해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 대국에 오를 것이 확실하다. 2009년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을 이미 턱밑까지 추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메릴린치는 2010년 중국의 GDP는 5조5000억 달러에 달해 5조1900억 달러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되는 일본을 따돌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9년 수출에서 독일을 누르고 세계 2위에 오를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미국·중국의 ‘G2 체제’가 뚜렷해지는 셈이다.작년에 중국도 미국과 유럽 시장의 위축으로 수출세가 한풀 꺾이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경기 부양 정책으로 8%대 성장률을 무난하게 달성했다. 재정 압박으로 대다수 국가의 경기 부양책이 막을 내릴 것으로 예상되는 것과 달리 중국은 필요하다면 이를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중국은 글로벌 위기에 따른 수출 급감으로 내수 활성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러한 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중국 경제의 수출과 내수가 균형을 잡으려면 앞으로 수년간의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전환은 수많은 나라에 큰 혜택을 가져다줄 것이다.2010년 중국은 인구학적으로 중대한 전환점을 통과하게 된다. 노동자들이 부양해야 하는 인구의 비율을 뜻하는 ‘부양비율’이 최저점을 찍는 것이다. 이는 올해가 인구통계학적으로 중국에는 최고의 해라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동안 계속 낮아지던 부양비율이 올해를 기점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의미도 된다. 1970년대 이후 중국의 출생률은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린 반면 노년층 인구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노인층을 먹여 살릴 젊은이들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중국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다. = 인도가 글로벌 경제 위기에서 빨리 벗어난 데는 시골 농촌 지역의 수요도 한몫했다. 인도의 최대 자동차 회사인 마루티 스즈키는 2009년 3월까지 시골 지역에서 자동차 판매량이 두 배 넘게 증가했다. 샴푸나 치약 같은 소비재 판매도 도시보다 시골에서 더 빨리 늘고 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경제 위기는 먼 나라의 일일뿐이다.인도 경제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장마와 가뭄이다. 관개시설이 거의 없는 지역에 물을 대주었던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면서 인도의 절반 가까운 지역이 가뭄에 시달렸다. 반면 장마가 휩쓸고 간 일부 지역은 홍수로 어려움을 겪었다. 장마와 가뭄은 농업 생산 저하, 식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고 결국 인플레이션 심화와 이를 막기 위한 금리 인상을 유발한다.하지만 2010년 인도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제조업보다 작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마침내 공업이 농업을 능가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허약한 제조업이 여전히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세계 두 번째 인구 대국 인도가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역사적 전환점을 통과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도의 산업생산 지수를 보면 제조업은 2009년 7월 이미 7% 이상의 성장세를 보였다. 해외 자본 유입이 다시 급증하면서 신설 공장도 속속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마이너스 8%’라는 2009년 성장률은 러시아 경제의 험난했던 한 해를 잘 정리해 준다. 러시아는 금융 위기 이후 신흥시장 중 가장 더딘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가 브릭스의 일원으로 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도 불붙었다.러시아의 위기는 에너지 산업에 지나치게 편중된 경제구조 탓이 크다. 최근 10년간 러시아는 매년 7~8%의 고성장을 기록해 왔다. 2000년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현 총리)의 리더십에 고유가라는 행운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동안 러시아는 철저하게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벌어들인 오일 달러에 의존해 성장했다.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하던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이 극적으로 표출됐다. 에너지 관련 세금이 크게 준데다 그루지야 전쟁에 따른 전비도 재정을 축냈다.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실시했지만 국고가 바닥난 러시아는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중국과 인도 등 다른 신흥국은 저만치 앞서가기 시작했다.올해 러시아 경제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과감한 경제 개혁과 국수주의의 발흥이 모두 가능한 시나리오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옳든 중요한 것은 국제 유가와 푸틴 총리-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라는 2중 권력의 향방이다. = 브라질은 위기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다. 1970년대 석유 파동과 1982년 멕시코 디폴트 선언, 1994년 테킬라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디폴트 등 글로벌 경제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브라질은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금융시장이 공황 상태에 빠지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아니 최근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브라질은 놀라운 저력으로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브라질은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성장과 낮은 인플레이션, 성숙된 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절정기를 맞고 있다. 철강 노동자 출신인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작년 ‘가장 늦게 위기를 맞고 가장 빨리 위기를 탈출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5%대 성장률을 되찾았다. 이런 추세라면 2014년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5대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브라질은 오렌지·쇠고기·사탕수수 등 농산물의 주요 수출국이면서 항공기를 자력으로 개발해 수출하는 나라다. 게다가 바이오에탄올 생산·수출국으로 대체에너지 주도국이기도 하다.2014년 월드컵과 2016년 남미 최초의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브라질의 성장은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금융 위기 이후 부진한 러시아를 밀어내고 인도네시아가 신흥 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며 비시스(BICIs)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브릭스(BRICs)에서 러시아(R)를 빼고 그 자리에 인도네시아(I)를 넣은 것이다.6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인도네시아는 인구수에서 중국·인도·미국에 이은 세계 4번째 나라다. 세계에서 이슬람 신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지만 이슬람이 국교는 아니며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20세 미만으로 젊어 내수시장만으로도 성장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농림 자원과 원자재도 풍부하다. 야자유·고무·코코아 생산량에서 세계 2~4위를 차지하고 산림자원은 면적 기준으로 동남아 최대 규모다.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진원지 가운데 하나였던 인도네시아는 2002년 이후 매년 4~5%대 성장을 유지했으며 작년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도 4%를 웃도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환율, 경상수지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치 사회적 환경도 안정을 되찾았다. 인도네시아 첫 직선 대통령으로 2004년 집권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은 기업 규제 철폐, 세제 개혁, 부패 척결 등 강력한 개혁 정책으로 단행했으며 군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과격 시위도 누그러뜨렸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달성해 작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우수하고 저렴한 노동력은 인도네시아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인도네시아 사람 80%가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며 인건비는 중국은 물론 필리핀과 태국보다 낮다. 여기에 사업하기에 유리한 제도적 뒷받침만 해주면 훨씬 많은 해외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 2000년대 들어 5~6%대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며 ‘미래의 유망 시장’으로 주목받던 아프리카는 작년 글로벌 경제 위기에 따른 원자재 가격 하락과 수출 감소로 주춤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올해 세계경제의 회복에 힘입어 4%대 성장이 예상된다.남아공은 아프리카의 중심 국가다. 2005년 기준 남아공 GDP는 2419억 달러로 아프리카 53개국 전체 GDP의 27%를 차지했다. 상품 교역액 역시 전체의 20%를 차지하는 아프리카의 최대 경제 대국이다. 남아공은 세계경제의 새로운 다크호스로 일찍부터 이름이 오르내렸다.오는 6월 시작되는 남아공 월드컵은 수십억 세계인을 사로잡을 빅 이벤트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남아공의 월드컵 특수가 기대에 못 미칠 것이라는 회의적인 전망이 적지 않지만 이번 행사가 아프리카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될 것은 분명하다.남아공은 남한의 12배 국토에 인구 5000만 명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5400달러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 여기에 ‘블랙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흑인 중산층만 250만 명에 달해 상품 구매력 또한 충분하다. 철강과 석유화학이 제조업 생산량 1~2위에 올라 있고 BMW·벤츠·도요타 등의 생산 기지가 들어서면서 자동차 산업도 GDP의 7% 이상을 차지한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