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첫 월급봉투

화천기공에 입사한 이듬해인 1970년, 나는 월급봉투를 어머니께 살짝 건네 드렸다. 내 월급봉투는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 한 기업 사장님의 사모님으로 살아오신 어머니가 난생 처음 받아보는 월급봉투였다. 그렇다. 그것은 아버지의 월급봉투였다. 당시, 어머니의 첫 반응은 ‘세상에, 아이고 우리 부처님’이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하지만 그 많던 재산도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를 따라 거의 다 없어지고 매일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 심지어 학교도 초등학교 4학년 중퇴로 마쳐야 했으니, 공부를 좋아했던 아버지로선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것이다. 아파하기 전에 식구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당시 장남의 몫이었다. 열다섯 살 아버지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렇게 얻은 일이 바로 일본인이 운영하던 철공소에서의 막노동이었다. 하루 급여 50전에 아버지가 몸을 데어가면서 열정과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던 곳이다. 그곳이 지금 내가 경영하는 화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특유의 성실함으로 인정을 받은 아버지는 이내 다른 공장에 스카우트돼 갔다. 거기서도 신임을 얻은 아버지는 일본 패망 뒤엔 아예 일본인 공장주인 시게우라 씨에게서 공장을 인수 할 정도로 대내외 신망을 얻었다. 성실함과 끈기가 낳은 결과였다.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식솔’ 또한 이에 맞춰 늘어났다. 이제 아버지는 서른 명 남짓한 공장 임직원과 그들에게 딸린 식구 등 크게 확장된 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그 모든 뒤치다꺼리를 맡아 하면서도 어머니는 10원 한 장 아버지의 월급을 받아보지 못했다. 대신 매일매일 아버지에게 공장으로 찾아가 반찬 값을 타다 썼으며, 그나마도 공장 사정이 좋지 않으면 받지 못했다. 바로 이런 점이 내가 월급봉투를 건넸을 때 ‘아이고 부처님’이란 탄성이 나오게 만든 계기다. 남에게는 호인이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가족에게는 이보다 더 엄한 사람이 없었다. 어릴 때 친구와 싸워도 혼나는 건 나였다. 요새 젊은 부모들처럼 아이의 기를 살린다고 내 아이를 꾸짖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정말 싸우고 있으면 어디서 싸우느냐고 뺨을 맞는 건 나였고 동생들보다 장남인 내게 더욱 엄격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서운했지만, 그러면서도 아버지에게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가 갖고 있던 사물에 대한 직관과 현상을 파악하는 통찰력 때문이었다.예를 들어 평생 도면 보기나 공장 운영 등에서 핵심 요소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정치와 결탁하지 말고 이문을 챙기기 위해 부동산 등 다른 손쉬운 방법을 쓰지 말라고 하시는 등 경영 전반에서 올곧은 근본과 핵심을 강조하셨다. 이런 아버지의 정신은 ‘덕인(德人)’이란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문구는 예전 광주터미널을 지을 때 아버지가 개발 예정 부지에 있던 화천의 부지를 흔쾌히 내어 놓으면서 비롯됐다. 당시 아버지의 희생정신에 감탄한 광주 지역 상공인들이 자발적으로 ‘덕인(德人)’ 비석을 세워 화천 광주공장에 기증했으며, 그것이 자연스레 화천의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한평생 별다른 여흥 없이 세상을 보내다 가셨다. 야구와 국악을 좋아하셨던 게 유일한 취미였을까. 그 외에는 정말 천직이다 싶을 정도로 현장을 중시했고 은퇴하고 나서도 수시로 공장에 들러 젊은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런 현장 중시 경영이 지금은 은퇴 후에도 계속 일해 주시는 분이 있을 정도로 장인 기업 화천의 60년 뼈대를 이루는 근간이 됐다. 다시 한 번 아버지와 만난다면, 요즘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아들의 손을 잡고 그 좋아하시던 야구장에 함께 놀러 갈 수 있을까. 부침이 많은 요즈음, 아버지의 올곧은 ‘고집’이 그 언제보다 그리운 때다. 권영렬·화천그룹 회장 1969년 화천기공에 입사한 후 지난 1997년 화천기공, 화천기계공업, 서암기계공업, TPS코리아 등으로 구성된 화천그룹의 회장직에 올랐다. 2006년 ‘한국을 빛낸 엔지니어 60인(서울대 공대, 한국공학한림원 선정)’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