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정권의 뉴 재팬

반세기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일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지난 9월 16일 정식 출범했다. 역사적 정권 교체였던 만큼 새로운 일본 정부에 거는 기대가 안팎에서 크다. 반면 변화의 방향과 속도가 아직 확실하지 않아 불안감도 상존하는 게 사실이다.특히 세계경제 위기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발한 일본 민주당 정부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발등의 불인 침체 경기를 회복시켜야 하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인기 공약도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선거 때 천명했던 관료 주도의 정치 타파, 대등한 미·일 관계 추구 등 국정 개혁도 추진해야 한다.이런 변화와 개혁을 얼마나 능숙하게 성공시키느냐가 하토야마 내각의 운명을 좌우할 게 분명하다. 자칫 경제 논리를 무시하고 인기 영합주의에 매몰되거나,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국내 정치용 외교’에 치중할 경우 실패한 정권이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경우 역사적인 정권 교체의 의미가 퇴색하는 건 물론이다. 일본이 한발 뒤로 후퇴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토야마 정부는 자민당 정권으로부터 사상 최악의 실업률과 재정적자, 쪼그라든 산업 기반을 물려받았다. 샴페인을 터뜨리며 새 정권의 출발을 축하하기엔 경제 상황이 말이 아니다. 소득이 줄면서 국민들이 지갑을 닫는 바람에 물가 하락, 생산 축소, 고용 불안, 성장 둔화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경기가 정점이었던 2007년 4분기(10∼12월)의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563조 엔이었다. 그러나 올해 1분기(1∼3월)엔 520조 엔으로 43조 엔(7.6%)이 줄었다. 2분기(4∼6월) 성장률이 플러스로 반전했다고 하지만 GDP 감소분의 7% 정도를 회복했을 뿐이다.일본의 7월 실업률은 5.7%로 사상 최악이었다. 소비자물가는 2.2% 떨어졌다. 전형적인 디플레이션 양상이다. 기업들의 수출이 크게 줄면서 생산 활동이 저하되고, 고용과 소득이 불안해지면서 연간 40조 엔의 수요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게 물가 하락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토야마 정부는 207조 엔(올해 기준)의 연간 예산 가운데 공공사업 중단과 행정 예산 감축, 각종 기금 등에서 재원을 마련해 국민들에게 직접 나눠줌으로써 수요를 창출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실효성은 불투명하다.특히 자녀 수당, 고속도로 무료화 등 핵심 공약의 재원 조달은 난제 중 난제다. 하토야마 정부는 중학생 이하의 자녀에 대해 내년에는 한 명당 월 1만3000엔, 2010년부터는 2만6000엔씩을 현금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공립고교의 학비는 무료화하기로 했다. 사립 고교생에게는 연 12만 엔의 학비를 지원한다. 고속도로 무료화도 승용차를 가진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그런 인기 공약을 모두 지키려면 내년에만 7조1000억 엔, 2011년부터는 16조8000억 엔의 돈이 필요하다. 일본의 연간 방위예산(약 4조8000억 엔)의 3.5배 규모다. 하토야마 정부는 이 돈을 공공사업 감축과 공무원 인건비 삭감 등을 통해 조달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추가적인 국채 발행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경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악인 재정 상태는 파산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하토야마 총리는 총선 기간 내내 국정의 중심을 관료 집단에서 정치인으로 옮기겠다고 강조했다. 정치인 중심의 정치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정치를 말한다. 관료들이 사실상 국정 운영을 독점하면서 부처 이기주의, 낙하산 인사를 통한 전·현직 관료 간의 카르텔과 그에 따른 정경유착 등이 일본 사회의 비효율의 극치를 불러왔다. 이는 곧 국가 경쟁력 하락을 통한 서민 생활의 붕괴를 가져왔다는 시각이다.이에 따라 하토야마 총리는 관료 정치의 상징으로 123년간 지속돼 온 ‘사무차관 회의’를 폐지했다. 대신 핵심 측근 정치인들로 구성된 국가전략국이 중심이 돼 예산 재편성을 시작으로 전방위적인 개혁에 나서기로 했다. 첫 시험대는 올해 추경예산안과 내년도 예산안 편성이다. 하토야마 내각은 자민당 정권이 짰던 예산을 근본적으로 다시 편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일부 사업 중단 등 성청(부처)의 반발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또 집권 경험이 풍부한 ‘야당’ 자민당이 우정민영화 재검토 등 민주당 정책에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설 경우 정국이 격랑에 휩쓸릴 가능성도 적지 않다.그러나 하토야마 정권도 출범 초기부터 개혁 드라이브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주요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민심이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른다. 당장 내년 7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가 최대 시험대다. 현재 민주당은 참의원의 제1당이지만 단독 과반수에 미달한다. 각종 개혁 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돼야 참의원 선거에서도 승리해 안정적인 정권 기반을 다질 수 있다.이와 함께 ‘오자와 변수’도 하토야마 내각이 넘어야 할 산이다. 하늘에 태양은 한 개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엔 태양이 두 개다. 하토야마 총리 말고도 오자와 이치로 신임 간사장은 강력한 태양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첫 내각 인선에서부터 일일이 오자와 간사장의 ‘결재’를 받았다. 9월 초 하토야마 총리는 후지이 최고고문을 재무상에 기용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오자와 간사장이 난색을 표명해 막판까지 내정하지 못하고 질질 끌었다. 9월 14일에야 겨우 오자와 간사장의 이해를 얻어냈다.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자와 간사장은 민주당 정권의 실질적 오너다. 8·30 총선 압승은 오자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총선 공천을 주도한 오자와 간사장의 당내 계파 의원만 150명에 달한다. 하토야마 그룹(45명), 간 나오토 그룹(60명), 마에하라 그룹(60명)을 압도하는 최대 파벌이다. 정당에서 의원 수는 곧 힘이다. 하토야마 외교의 출발은 ‘긴밀하고도 대등한 미·일 관계’다. 여기에 한국과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외교 비전으로 제시됐다. 과거 미국 의존형 외교에서 탈피하겠다는 뜻에서는 두 가지 항목이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하토야마 총리의 이런 외교 방향은 미국 측으로부터 적지 않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이미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하토야마 총리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비판과 아시아 중시 외교 방침을 부각하면서 ‘하토야마=반미’라고 보도하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취임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통해 “미·일 동맹이 기축”이라고 강조하는 등 미국 내 여론 추스르기에 나서긴 했다. 그러나 속단할 수는 없다.일본에 핵무기 반입 등을 금지하는 비핵 3원칙이나 미·일 지위협정 개정 문제, 인도양에서의 다국적군 함대에 대한 해상자위대의 급유 지원 활동 연장 문제 등 두 나라 간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미·일 간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반면 하토야마 내각에서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외교는 한층 진전될 전망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미 동아시아 공동 통화 창설 구상을 천명하고, A급 전범이 합사(合祀)돼 한국과 중국 등이 주시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자민당 정권과의 차별화된 모습이다.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하토야마 정권에 대한 기대가 높은 이유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