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 경제학

지구촌 곳곳에서 ‘신종플루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4번째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우려는 공포로 돌변했다. 직경 80나노미터(nm)에 불과한 이 작은 미생물(H1N1)은 가뜩이나 취약해진 세계경제마저 위협할 태세다. 최악의 경우 글로벌 경기 회복은 1년 이상 지연될 것으로 예측된다. 하지만 신종플루의 대유행은 항바이러스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한 제약사들에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은 감염병의 무풍지대로 여겨졌다. 수년 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과 조류 인플루엔자(AI)가 차례로 아시아 지역을 강타했지만 한국만은 예외였다. ‘김치와 마늘이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다’, ‘사계절에 익숙한 한국인은 바이러스에 강한 체질이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다 보니 지난 6월 세계보건기구(WHO)가 멕시코에서 출현한 신종플루가 ‘대유행(Pandemic)’ 단계에 들어섰다고 선언했을 때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8월 중순 국내에서 첫 사망자가 나오자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각급 학교의 ‘대책 없는’ 개학에 학부모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기업들은 경제적 파장을 우려하며 숨을 죽이고 있다.지난 9월 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신종플루 위기 대책 토론회.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가 발표자로 나섰다. 김 교수는 8월 말 발족한 ‘민관합동 신종플루 대책위원회’에 민간 전문가로 참여한다. 수많은 회의와 설명회, 언론 인터뷰, 진료 등으로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신종플루의 위험이 과장됐다’는 일각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강경파에 속한다. 김 교수는 “지금은 말뿐인 대책이 아니라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한 ‘전쟁’ 상황”이라며 “효과적인 대응으로 유행 피크를 얼마나 낮추느냐가 관건”이라고 잘라 말했다.김 교수에게 신종플루 대유행은 그리 놀랄만한 사건은 아니다. 어느 정도 예견된 사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한 세기에 3번의 감염병이 유행한다”며 “그 주기가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세기에 인류는 3번의 초대형 감염병을 경험했다. 1918년 발생한 스페인 독감과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이 그것이다. 1차 세계대전 때 유럽과 미국을 덮친 스페인 독감은 무려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시아 독감과 홍콩 독감도 수많은 희생자를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대유행이 10년 또는 40년을 주기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지난해는 홍콩 독감이 발생한 때로부터 꼭 40년이 되는 해였다. 더구나 2004년 치사율이 63%인 맹독성 AI 바이러스 출현으로 WHO는 일찌감치 ‘21세기 첫 번째 감염병 대유행’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기 시작했다.김 교수는 “많은 전문가들은 2008년 AI가 창궐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당초 예상보다 한 해 늦은 2009년 4월, 그것도 신종 바이러스가 주로 출현하던 아시아 지역이 아닌 멕시코에서 ‘신종플루’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발생 초기 멕시코에서 순식간에 800여 명이 감염되고 그 가운데 8%가 사망해 큰 충격을 던졌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신종플루의 치사율은 1%에 머무르고 있다. 일단 감염되면 63%가 죽음에 이르는 AI에 견줘 독성이 현저히 낮은 셈이다. 예상은 빗나갔지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신종플루의 위험성이 일반 계절 독감에도 못 미친다는 낙관론을 펴기도 한다. WHO 통계에 따르면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매년 각 나라마다 10% 안팎의 인구가 계절 독감에 감염되고 이로 인해 세계적으로 25만~50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이에 비해 8월 23일 현재 세계 신종플루 감염자는 20만9000여 명, 사망자는 2185명에 머무르고 있다.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김 교수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변종’의 출현이다. 신종플루는 초기 멕시코와 남미 지역을 휩쓸고 그 후 유럽과 아시아 등 북반구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처럼 남반구와 북반구를 오가면서 증식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바이러스는 하루에도 수차례 복제와 증식, 변이를 반복한다. 김 교수는 “신종플루는 특히 ‘에러’가 많은 바이러스”라고 말했다. 돌연변이가 누적되면 처음과 전혀 다른 바이러스로 돌변할 수 있다. 스페인 독감도 초기에는 증상이 심각하지 않고 사망자도 적었지만 약 6개월 뒤 독성이 몰라보게 강해져 대참사를 가져온 사례도 있다.변종의 출현 경로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몸속에서 신종플루와 계절 독감 바이러스가 섞이면서 제3의 변종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신종플루의 높은 감염성과 계절 독감의 항바이러스제 내성을 모두 갖춘 새로운 변종의 출현도 예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악은 신종플루와 AI 바이러스가 만나 결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감염성과 치사율 60%의 맹독성을 겸비한 그대로 ‘슈퍼 바이러스’가 탄생하게 된다.지금까지 확인된 신종플루의 가장 큰 특징은 감염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마거릿 챈 WHO 사무총장은 최근 “신종플루의 확산 속도가 다른 바이러스보다 4배나 빠르다”며 “다른 바이러스가 6개월 동안 이동할 거리를 신종플루는 불과 6주 만에 움직이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계절 독감(10%)보다 3배 많은 전체 인구의 30%가량이 신종플루에 감염될 수 있다고 추정한다.신종플루의 또 다른 특징은 젊은 층을 주 타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는 신종플루의 사회·경제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일반 계절 독감은 어린이와 65세 이상 노인이 주된 희생자다. 반면 신종플루는 세계적으로 30세 이하 감염자가 가장 많고 사망자 역시 20~40대 비중이 가장 높다. 이는 가장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벌이는 연령층이 신종플루에 가장 취약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더구나 신종플루는 계절 독감보다 감염성이 3배나 강하다. 쉽게 말해 직원 100명 가운데 1~2명이 계절 독감에 걸려 결근해도 회사는 큰 문제없이 돌아가지만 이 숫자가 3배 이상 늘어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 최근 콜롬비아와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신종플루에 감염돼 공식 일정을 취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최고경영자(CEO)나 핵심 경영진이 감염될 경우 기업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한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아직 신종플루가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신종플루는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감염 속도와 치사율은 현재까지의 잠정적인 진행 상황을 나타내 주는 것뿐이다. 특히 치사율도 고정된 수치가 아니다. 영국은 치사율이 0.2%인데 비해 아르헨티나는 4.5%에 달한다. 보건의료 인프라와 효과적인 대응 여부에 따라 치사율이 2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세계은행은 인플루엔자의 감염 속도와 치사율에 따라 3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낙관적 시나리오다. 사망자가 홍콩 독감 수준인 140만 명에 그친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경제의 성장률은 0.7%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보다 상황이 악화돼 아시아 독감과 같은 142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성장률은 2.0%포인트 하락이 예상된다.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는 신종플루가 ‘제2의 스페인 독감’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 경우 7110만 명 사망, 성장률 4.8%포인트 하락이 예상된다.영국 컨설팅 업체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신종플루의 경제적 영향에 대해 좀 더 세밀한 분석을 내놓았다. 이 업체는 지난 7월 초 신종플루가 글로벌 경제 회복을 1~2년가량 지연시킬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신종플루는 공급과 수요 양 측면에서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 공급 측면에서는 고용자가 신종플루에 감염되거나 이로 인해 사망하면 업무 공백이 발생한다. 더구나 자유로운 여행이 제한될 경우 비즈니스 자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수요 측면에서는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항·기차역·식당·극장·쇼핑센터 같은 공공장소를 피하는 사람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여행과 관광, 소비지출의 위축을 가져온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높은 실업률과 부채 때문에 가계는 불필요한 지출을 훨씬 과격하게 줄일 게 뻔하다. 또한 신종플루의 충격과 지속 기간에 대한 불확실성은 기업 투자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다. 신종플루는 지난해 신용 붕괴 이후 그 여파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금융시장에도 또 한 번 치명타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보고서는 전 인구의 30%가 신종플루에 감염되고 그중 0.4%가 사망하는 것으로 가정했다. 감염자는 2주 동안 업무에 복귀하지 못하는 것으로 했다. 과거 사례를 보면 감염병이 퍼질 경우 직격탄을 맞는 곳은 관광산업이다. 2003년 SARS 발생으로 홍콩의 해외 관광객은 무려 60%나 급감했다. 이번에도 같은 규모의 관광 수요 위축을 예상했다.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이를 통해 영국에서 신종플루의 경제적 비용은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할 것이라는 계산을 내놓았다. 이 업체는 신종플루가 세계경제를 ‘디플레이션’으로 몰고 갈 위험성도 경고했다. 기업과 금융권이 글로벌 경제 위기로 비틀거리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신종플루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그동안 미뤄 둔 소비에 나서기는커녕 저축을 더 늘리려고 주머니를 닫으며 경기 침체로 이미 허약해진 기업은 또 한 번 흔들릴 것이다. 물론 이 보고서는 주로 영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영국은 유럽에서 신종플루 감염자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8월 말 현재 영국에서는 13만 명이 신종플루에 감염됐고 그 가운데 66명이 사망했다.그러나 신종플루가 모두에게 끔찍한 재앙인 것은 아니다. 신종플루 항바이러스 치료제를 생산하는 제약사들은 수요가 폭증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지금까지 개발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치료제는 스위스 제약사 로슈의 타미플루와 영국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리렌자 단 두 개뿐이다. 이 가운데 타미플루는 시장에 늦게 나왔지만 코로 들이마시는 흡입식인 리렌자에 맞서 ‘먹는 알약’ 형태라는 편리함을 내세워 항바이러스 치료제의 대명사로 급부상한 제품이다. 현재 각국은 신종플루의 가을철 대유행에 대비해 타미플루 비축에 사활을 걸고 있는 형편이다.이러한 수요 급증에 힘입어 지난 상반기 타미플루 판매액은 전년 같은 기간에 견줘 무려 203%나 뛰었다. 로슈는 지난 1분기와 2분기에 각각 4억300만 스위스 프랑, 6억900만 스위스 프랑어치의 타미플루를 팔아치웠다. 이 회사는 올해 타미플루 매출이 20억 스위스 프랑(약 2조3516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하지만 타미플루를 실제 개발한 곳은 미국의 바이오 제약 회사 길리어드다. 타미플루의 생산과 판매는 로슈가 맡고 있지만 특허권은 여전히 길리어드가 쥐고 있다. 이 업체도 타미플루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면서 지난 2분기에만 5190만 달러의 로열티 수익을 챙겼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액수다.길리어드의 타미플루 개발 스토리는 대박을 터뜨린 신약 개발 성공 신화의 전형이다. 길리어드는 현재 연매출 50억 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제약 회사로 손꼽히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직원 10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바이오 벤처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6년 타미플루 개발에 성공했고, 1999년 이를 로슈에 기술이전하면서 대도약에 성공했다.길리어드에서 타미플루를 개발한 주역은 놀랍게도 한국인 김정은 부사장이다. 미국 오리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다국적 제약 회사 브리스톨마이어(BMS)를 거쳐 1994년 길리어드로 자리를 옮긴 김 부사장은 네이처에 실린 GSK의 논문을 보고 타미플루 개발 아이디어를 얻었다. GSK의 논문은 흡입 방식의 독감 바이러스 치료제(상품명 리렌자)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불편한 흡입식보다는 먹는 알약 형태로 개발하면 몇 년 늦게 시장에 내놓아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 부사장은 시장과 고객의 요구를 읽는 자세를 무엇보다 강조한다.백신 업체들도 신종플루 확산으로 뜻밖의 특수를 누리고 있다. 타미플루 등 항바이러스제가 감염자에 투여하는 치료제라면 백신은 감염 자체를 사전에 차단하는 예방 효과를 발휘한다.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배양해 백신을 만든 다음, 이를 인체에 접종해 면역력을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비용 대비 효과로 따진다면 가장 확실한 대응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수급 조절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일반적으로 인플루엔자 백신은 유정란을 이용해 생산되는데 생산에만 몇 개월이 걸리고 상반기에 다음 시즌의 백신을 한꺼번에 제조하는 체제로 운영된다. 국내 유일의 백신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녹십자 이병건 개발본부장은 “유정란 확보를 위해 6개월 이상 수십억 원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백신을 만들어 놓고 팔리지 않으면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인플루엔자 백신은 겨울이 지나면 전량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이 때문에 감염병 예측에 실패하거나 이번 경우처럼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처음부터 다시 생산 라인을 가동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다 보니 공장을 풀가동해도 백신 생산 속도가 바이러스 확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세계 백신 시장에서는 ‘사전 구매 계약(APA)’이 일반적이다. 인플루엔자 대유행시 우선적으로 공급받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매년 일정액을 부담하는 구조다. 이번에도 APA로 물량을 미리 확보해 둔 선진국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 세계 백신 시장은 GSK, 머크, 사노피아벤티스, 와이어스 등 4대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그동안 백신 산업은 개발에 실패할 경우 비용 손실이 크고 고도의 제조 기술이 필요하며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제약 회사들이 기피해 온 분야였다. 하지만 신종 바이러스 출현이 잇따르면서 새로운 성장 산업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2004년 95억 달러에 불과하던 세계 백신 시장 규모는 매년 15% 이상 고성장을 거듭해 2010년에는 250억 달러 규모의 거대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측된다.한국은 지난 7월 녹십자 화순공장이 준공되면서 세계 12번째 ‘독감 백신 자체 생산국’에 올랐다. SARS가 휩쓸고 지나간 2004년부터 정부는 국가적으로 자체 백신 생산 능력 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를 추진해 왔다. 정부는 화순공장 건설에 정부 지원금 162억 원을 투입했다. 때마침 신종플루가 유행하면서 준공과 동시에 24시간 가동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화순공장은 향후 세계 백신 시장에서 한국의 가격 협상력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