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가시지 않는’ 글로벌 금융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결국 파산에 내몰리면서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대마불사(大馬不死)’ 논리가 적용되던 대형 투자은행마저 결국 파산 위협을 피하지 못해 극단적인 카운터파티 리스크(counterparty risk:거래상대방 위험)가 고조되면서 안전 도피 심리와 유동성 각축전이 본격화된 것이다.그 결과 글로벌 자금 흐름의 신경 회로라고 할 수 있는 은행 간 자금시장이 붕괴되는 한편 주가가 폭락하고 각종 위험 스프레드가 폭등하는 등 극심한 불안감이 세계 전역을 휩쓸었다. 직후 세계 각국의 동반 금리 인하를 포함해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양적 완화 등 대규모 유동성 투입, 그리고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공적 자금 투입 등에 힘입어 극단적인 안전 도피 심리는 다소 완화됐지만 ‘시장 정상화’는 꿈도 꿀 수 없었다.다행히도 지난 3월 이후 이러한 불안감은 글로벌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 공조에 힘입어 상당히 진정되고 있다.그 결과 세계 증시가 3월 저점을 통과해 안도 랠리를 구가하는 등 국제 금융시장이 뚜렷이 안정되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글로벌 금융 불안의 척도로 간주되는 VIX지수(시카고옵션거래소에 상장된 S&P 500 지수 옵션의 내재 변동성 지수)는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전 수준으로 안정되고 있으며 글로벌 자금시장 불안의 잣대인 TED 스프레드(3개월물 리보 금리-3개월물 미국 국채 수익률)는 아예 서브프라임 이전 수준으로 복귀했다. 한편 3월 초 동유럽 신흥 시장 위기와 상업은행 위기가 겹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외화 유동성 위기가 고조되며 원·달러 환율이 1600원을 위협할 정도로 폭등한 바 있지만 이후 빠르게 하향 안정세로 돌아섰다. 물론 제너럴모터스(GM) 파산이나 2분기 실적 시즌을 앞두고 세계 금융시장이 다소 조정을 거치고 원·달러 환율도 정체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워낙에 충격의 상흔이 컸던 탓일 뿐 대체로 ‘위기의 끝’을 알리는 긍정적인 신호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하반기 들어서도 막상 우려했던 미국의 2분기 실적 시즌이 대체로 양호한 결과를 보이면서 국제 금융시장이 다시금 강한 탄력을 받고 있다. 특히 골드만삭스를 비롯해 미국 등 세계 대형 금융회사들의 실적이 기대 이상의 호조세를 보인 데다 추가적인 부실도 억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주목을 끈다. 물론 미국의 중소기업 대출 전문은행인 CIT와 같이 일부 중형 은행의 파산 위험이 부각되기는 했지만 리먼브러더스 파산 등과 같은 시스템 차원의 위험은 크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제는 2분기 이후 중국을 필두로 세계경제의 저점 통과도 사실상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이제 ‘뜨거운 여름’이 본격화되고 있다.그러나 여전히 지금의 랠리 혹은 회복세의 지속력과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도 상존한다. 이미 미국에서는 경기 침체의 후폭풍이 거세지면서 상업용 부동산과 신용카드 등에서 부실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사실 상업은행 위기, 특히 중소 지방은행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가 시스템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은 작지만 금융권 전반의 추가적인 자산 상각과 자본 확충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디레버리징(deleveraging)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또 1분기에 이어 2분기 중 기대 이상의 실적에 힘입어 점차 시장의 눈높이가 상향 조정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사실 금융권의 실적 호전은 시가평가제 유예 등에 따른 회계적 성격이 강하며, 또 상당 부분 최근 시장 환경 개선에 힘입은 트레이딩과 직접 투자 등의 실적 호조의 영향이 크다. 따라서 시장 여건이 변할 경우 실적이 다시 악화될 수 있고 잠재 부실과 함께 실적의 내역에 대한 의구심이 부각될 경우 다시 조정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3분기 실적 시즌이 주목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게다가 유럽발 금융 불안 우려도 좌시하긴 힘들다. 유럽판 서브프라임 사태의 신호탄으로 알려진 동유럽 신흥 시장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서유럽 금융회사들의 동유럽 노출을 감안할 때 부실이 늘어날 소지가 크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실 동유럽 노출은 오스트리아와 같은 일부 인근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상대적 비중이 미미하다. 따라서 동유럽 문제만으로 시스템 리스크가 초래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이번 위기로 인해, 또 위기 대응 과정에서 역내 통합 시스템이 균열 징후를 드러낸 상황에서 동유럽 문제가 유럽의 시스템 위기를 촉진할 기폭제가 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여전히 주권이 분리된 상황에서 이른바 ‘금융 보호주의’가 부각되면서 부실 처리 진전은 물론 손실 인식마저 저해하고 있기 때문이다.또 하나 간과해선 안 될 문제는 ‘유동성 역류(liquidity backflow)’ 현상이다. 그동안 세계 각국이 대규모 유동성 투입을 통해 자금시장 안정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TED 스프레드 추이에서 보듯이 글로벌 자금시장 여건도 크게 안정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금시장 안정, 혹은 풍부한 유동성이 실물경제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지는 못하다. 아직도 생존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금융권의 유동성 확충 노력이 거듭되고 있는 데다 가계나 기업의 신용 리스크도 제대로 통제되고 있지 못한 때문이다. 따라서 유동성은 금융회사와 금융회사 혹은 정부(통화당국) 사이만 오가면서 세계적으로 일종의 ‘돈맥경화’ 현상을 빚고 있다. 기껏해야 일부 여유 자금이 지금 다시 퍼지고 있는 낙관론에 편승해 주식시장이나 신용시장 혹은 상품시장으로 흘러들면서 새로운 투기를 조장하고 있다. 하지만 자산 디레버리징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투기 버블의 지속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이런 맥락에서 보면 앞으로 리먼브러더스 붕괴와 같은 시스템 리스크가 고조되면서 글로벌 차원의 금융 패닉이 초래될 여지는 미미하지만, 금융 불안은 언제라도 재현될 소지가 큰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리먼브러더스 붕괴의 충격에 따른 직접적인 위기는 막을 내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초대형 신용 버블 붕괴 이후 광범위한 디레버리징을 매개로 전반적인 금융 환경의 축소 균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흔히 말하는 시장 정상화는 당분간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도 랠리는 패닉이 잦아진데 따른 반대급부일 뿐 지속적인 랠리로 이어지기 힘들다. 오히려 새로운 영역, 혹은 새로운 형태로 금융 불안이 불거질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우선 주목되는 것은 달러 위기의 가능성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달러 가치 향방이 아니다. 환율이라는 것이 본래 상대가격인 이상 상대통화의 가치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정작 쟁점은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의 신뢰성 약화에 따른 새로운 시스템 리스크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지탱했던 이른바 달러 리사이클링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경제가 또 한 번 요동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출구 전략(Exit Strategy)’에 따른 정책 실패의 위험이다. 이미 지적했다시피 유동성 역류로 인해 과잉유동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점차 중·장기적인 금융 안정 차원에서 선제적인 조치의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위기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건 금융 불안의 재현 소지가 큰 상황에서 자칫 성급한 출구 전략 논의가 도리어 시장 불안을 증폭시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장보형·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jangbo@hanaif.re.kr©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