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사막 ⑤
이 주의 명작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리더는 추종자 집단이 있다고 피터 드러커는 정의한다. 예컨대 MIT는 ‘사학의 리더’라고 할 수 있다. 자녀가 MIT에 진학이라도 하면 학부모는 이내 열렬한 추종자가 된다.CNN 인텔 MTV 스타벅스 나이키 IBM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은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한 회사들이다. 지금 포스트잇, VCR, 팩시밀리, CNN, 크라이슬러 미니밴, 휴대전화 등은 세상을 주도하는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시장을 창조해 성공한 제품은 거의 예외 없이 처음에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성공으로 접어드는 데는 대부분 수년에서 10여 년이 걸리는 등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 내야만 했다.톰 피터스는 ‘혁신경영’에서 이들 브랜드를 가리켜 “이들은 브랜드의 군계일학이다. 이제는 개인도 브랜드의 군계일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초기에 지속적으로 거부당하는 고통을 견뎌 내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이 한 줄에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문구가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미래를 개척하는 리더들은 상당한 고통을 겪고 이를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피터스는 “변화를 지배하는 자가 성공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인다면 성공을 위해서는 누구든 과감히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을 파괴하고, 조직을 배반하고, 안정된 자리를 떠나 고난의 기간을 가지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여기에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연암 박지원(1737~1805)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 박종채가 쓴 ‘나의 아버지 박지원(원제 과정록)’에는 박지원의 고단했던 삶을 파노라마처럼 재현하고 있다. 연암은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북학파의 거두였지만 지독한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 이 역시 연암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는 쉰 살에 선공감 감역이라는 종9품의 미관말직을 수락하고야 말았다. 주위에서 하도 딱했는지 날짜가 약간 모자라지만 관례상 융통성이 있다며 승진시켜 주려고 했다. 이때 연암은 “내가 평소에 한 번도 구차한 짓을 한 적이 없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날이 저물어 갈 길이 멀면 누군들 마음이 급하지 않겠는가. 그렇건만 평소 자신의 삶의 원칙을 이토록 지키다니!주위의 관리들은 연암의 소신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쉰 살에 9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연암 또한 ‘고속 승진’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1년 후인 54세에 종6품으로 승진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만년에 병환 중이실 때 붓을 잡아 큰 글자로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徇姑息 苟且彌縫)’이라는 여덟 글자를 병풍에 쓰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고 하셨다.이는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적당히 임시변통으로 땜질하는 태도를 뜻하는 말이다.피터스가 분석한 대로 하나의 명품 브랜드가 있기까지는 최소한 10년 정도의 굴욕의 기간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우도 그에게 가해지는 굴욕의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어떻게 처신하는지에 따라 군계일학이 되는지가 결정된다. 연암은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가족 부양조차 하지 않은 채 10여 년을 실학 공부에 매진했다. 이 기간이야말로 연암이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기간’에 해당할 것이다. 학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다.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분명하게 하고, 집을 한 채 짓더라도 제대로 지으며, 그릇을 하나 만들더라도 규모 있게 만들고, 물건을 하나 감식하더라도 식견을 갖추는 것, 이것이 모두 학문의 일단이다.이 말이야말로 연암의 실학사상을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암의 일생을 3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제1기는 35세까지로 과거 시험을 그만둘 때까지 학문에 발을 들여놓고 과거를 보려고 했던 입문기다. 제2기는 35세에서 50세 벼슬살이할 때까지 실학자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던 탐구기다. 제3기는 50세부터 69세까지 자기의 이상을 벼슬살이로 이뤄 보려고 한 실천기라고 할 수 있다. 벼슬살이 10여 년에 좋은 책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구나.그는 벼슬살이 10여 년 만에 눈이 너무 어두워져서 글을 잘 볼 수 없게 되자 이렇게 탄식했다. 연암은 14년 동안 공직 생활을 했고 물러난 지 4년 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만약 연암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면, 평생 실학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면 더 풍성한 저술들을 남기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연암은 실학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늘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식사는 소통의 출발이라는 것을 연암 역시 실천했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연암을 흠모했고 자주 찾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다시 연암이 아무나 사귄다고 비방해댔다. 이렇게 되자 그의 집을 드나들던 벗들은 하나둘 발길을 돌렸다. 중년에 이르자 그가 형이라고 한 홍대용만이 시종 변치 않으면서 연암과 우정을 나눴다. 명예와 권속, 잇속을 추구하는 벗들을 버리고 비로소 밝은 눈으로 이른바 벗이란 것을 찾아보니, 도무지 한 사람도 없사외다.연암은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소 넓게 교유했지만 벗들의 사귐이란 명예와 권세, 잇속을 추구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사마휘가 방덕공의 집을 찾아가 기장밥을 짓게 한 일을 그리워한다. 사마휘와 방덕공은 중국 삼국시대 사람으로 사마휘가 방덕공의 집에 들렀는데 방덕공은 어디 가고 없었다. 그러나 사마휘는 스스럼없이 그의 처더러 기장밥을 지으라고 했다. 방덕공의 처는 그에게 절한 다음 밥을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 이러한 우정을 다시 나눌 자 있을까.홍대용은 영천군수로 있을 때 연암에게 얼룩소 두 마리, 농기구, 공책 스무 권, 돈 200냥을 보내면서 “산중에 계시니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을 테지요. 그리고 의당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외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연암과 홍대용의 우정이 부럽기만 하다. 옛사람의 말 가운데 ‘걸핏하면 비방을 받지만 그래도 명성은 따른다’는 말은 아마도 허무맹랑한 말인 것 같다. 한 치의 명성을 얻으면 비방은 그 열 배나 돌아오는 법이다.세상은 시대정신을 앞서 전파하려는 연암에게 찬사보다 늘 비방을 일삼았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오자 그의 글을 놓고 비방의 말들이 난무했다. 그는 ‘열하일기’로 인해 자신에게 가해지는 ‘집단 이지메’에 심하게 자조하기에 이른다. 리더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추종자를 거느린 사람이다.피터 드러커는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세계적인 리더의 공통점은 바로 추종자들이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케인스학파’와 같이 제자나 추종자들이야말로 명품 브랜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홍보 마케터’라고 할 수 있다.피터스의 말처럼 연암은 개인적으로 고난의 기간을 거치면서 제자나 벗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원칙과 철학을 전파하고 저술로 세상에 남겨 마침내 퍼스널 브랜드의 군계일학이 될 수 있었다. 연암에게는 박제가와 이덕무 등 제자 그룹과 홍대용 등 벗들이 있었고 또 아버지의 발자취를 집대성한 똑똑한 아들이 있었다. 그는 당대에 늘 시비의 대상이었지만 사후에는 빛나는 이름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 시작은 기득권적 질서에 안주하지 않은 ‘자기 파괴’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톰 피터스의 ‘혁신경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거의 ‘악담’ 수준이지만 자신만의 퍼스널 브랜드를 꿈꾼다면 이 말을 가슴에 새길 경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누군가에 의해 망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경쟁자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인가이다. 실패하는 기업을 보면 기존 체제를 고수해 망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말도 안 된다! 가능한 한 빨리, 지금 당장, 자기 자신을 파괴하라.”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