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샘표간장’. 1946년 서울 충무로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간장 공장을 인수해 창업한 고(故) 박규회 사장은 상표를 ‘샘물처럼 솟아라’라는 뜻에서 ‘샘표’로 지었다. 그랬던 것이 어느덧 국내 최장수 등록상표가 됐다. 현재 샘표식품은 박승복(87) 회장과 박진선(59) 사장까지 3대를 이어가며 간장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하지만 2006년 우리금융 계열 사모 투자 펀드(PEF) 전문 회사인 우리PEF의 마르스 펀드가 지분을 매집해 2대주주에 오르면서 샘표식품은 오랜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작년 마르스 측은 공개 매수 카드를 꺼내 들었고 박 사장 등의 횡령 의혹도 제기했다. 그러나 60여 년 동안 쌓아 온 전통의 힘은 무서웠다. 주주들은 표 대결에서 경영진의 손을 들어줬고 3개월 동안 받은 국세청 조사도 깨끗했다. 마르스는 30%의 지분을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박 사장은 “기업은 주가를 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며 “일부에서 주장하는 주주 자본주의는 틀렸다”고 말했다. 지난 6월 30일 충무로 본사에서 ‘철학 박사 출신 최고경영자(CEO)’로 유명한 박 사장을 만나 ‘백년기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기업이 오래 지속했다는 것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바르게 성장해 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사랑도 받을 수 있는 거죠. 그런 기업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에 작지만 큰 행복을 줍니다. 또 그런 기업에서 일하는 구성원들도 행복하지요.회사를 세운 할아버지(고 박규회 사장)가 남기신 기본 철학이 큰 힘이라고 생각해요. 할아버지는 ‘인화, 신용, 봉사’를 샘표식품의 사훈으로 정하셨어요. 언뜻 보면 기업의 사훈으로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죠. 할아버지는 정말 검소하고 성실하고 항상 신용을 지키셨어요. 마음으로나 행동으로나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셨어요. 그런 것들이 은연중에 배어 이어져 내려온 겁니다. ‘설마 그럴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1990년 회사에 들어와 경영하면서 ‘그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구나’라고 느꼈어요.옛날에는 간장 담는 병이 아주 귀했어요. 그래서 1970년 때만 해도 병 수급이 중요한 문제였지요. 보통 맥주병을 썼는데 여름에는 수급이 달려 간장 회사에 병을 주지 않았어요. 공장에는 수거해 온 병을 다시 씻어 간장을 넣는 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아주 많았어요. 대부분 일용직이었지요. 그런데 원조 자금으로 병 자동 세척 주입기가 들어와 꼼짝없이 일자리를 잃게 됐는데 기계가 들어오기 바로 전날 할아버지가 아무도 몰래 그분들을 모두 정사원으로 발령을 내버렸어요. 물론 회사는 난리가 났죠. 그만큼 사람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분이었어요.기업은 사회가 원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창출해 공급하는 역할을 해요. 문제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그 일을 한다는 거예요. 기업은 하나의 조그만 사회를 이루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의 구성원, 즉 기업 구성원들이 어떻게 그 안에서 살고 느끼느냐가 아주 중요해요. 그들의 행복에 가치를 두고 그런 쪽으로 노력해야 해요.주주 자본주의는 틀렸다고 생각해요. 일반 주주가 기업 경영을 결정하는 것은 분명히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주주들은 경영에 대해 잘 알 수도 없어요.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대다수 일반 주주의 관심은 결국 주가가 올라 돈을 버는 것밖에 없어요. 하지만 기업은 주가를 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가만 생각하는 것은 기업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에요.적은 지분을 갖고 마음대로 한다고 대기업들을 비판하곤 합니다. 그러나 경영권은 기업가 정신과 관계된 거예요. 경영권은 그 자체로 보호해 줘야 제대로 경영할 수 있어요. 지분이 적다고 자꾸 문제 삼는 것은 맞지 않아요. 미국만 하더라도 차등주 발행이 허용돼 있어요. 기업에 선택권을 준 거죠. 이를테면 의결권에 차이가 있는 A주와 B주를 발행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자본을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어요. 반면 한국은 차등주가 허용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주식을 갖고 있으면 그대로 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의결권이 낮거나, 없어도 배당을 똑같이 받을 수 있어요. 투자자들은 배당을 많이 받고 주가가 오르면 차익을 챙기면 됩니다. 경영 자체에 영향을 미치려고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대부분의 투자자는 그런 관심도 능력도 없어요. 차등주 같은 걸 법으로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기업이 잘 되려면 기업가 정신이 가장 중요해요. 그걸 육성하고 활성화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가로막는 꼴이죠.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장기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주가를 빨리 끌어올려 돈 벌게 해 달라고만 하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요.기업은 ‘장사꾼’이 돼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어찌됐든 나만 돈 벌면 된다’는 생각은 곤란해요. 기업은 뭔가 생산적이고 좋은 일을 해야 하고 그 대가로 이익을 내고 그것으로 직원들을 행복하게 하고 또 더 새롭고 더 좋은 일을 하기 위해 투자하는 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그런 걸 다 무시하고 돈 버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지난해 터진 금융 위기도 금융 산업이 자기 본분을 잊고 돈 버는 데만 매달리는 식으로 변질돼 생긴 문제예요. 마르스 펀드도 다르지 않아요. 공격할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돈 벌려는 목적으로 뛰어든 거예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3년 동안 날을 세우고 공격하기만 했지 기업 발전에 도움을 준 것이 하나도 없어요.그게 참 웃긴 일이라고 생각해요. 경영자가 불법적 행위나 부도덕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고 그걸 감시하는 장치를 만들자는 것은 전적으로 동의해요. 하지만 그걸 넘어 회사를 경영하는 방향에 대해 여러 사람이 제각각 간섭하려고 드는 건 곤란하지요. 그래서는 회사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없어요. 더구나 ‘주가가 얼마나 오르나’ ‘이익이 얼마나 나나’ 하는 것만 들여다보고 그걸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잘못이에요. 기업 지배 구조 개선 펀드라고 내세우지만 결국은 자기들도 돈을 벌겠다는 것 아닌가요.경영권을 자식에게 주건, 아니면 전문 경영인에게 주건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자식에게 줄 경우 기업을 위해 좋은 점이 딱 한 가지 있어요.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가 만든 기업이기 때문에 잘해야겠다는 애착이 크다는 거죠. 회사 구성원들도 경영을 하다 힘들면 돈 챙겨 나갈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안정감을 줍니다. 누가 경영하느냐의 문제에서는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맞는다고 봐요. 경영은 그렇게 꼭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에요. 기본적인 자세와 타고난 능력이 중요하지요. ‘남모르게 보내는 힘든 시간을 감당해야 하는 일을 뭣하러 넘겨주나’ 그런 생각도 해요. 전문 경영인을 두고 편하게 살면 되는데, 그럴 만한 사람이 드물어요.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정도 신뢰가 쌓여야 가능하기 때문이죠.백년기업은 문제없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간장 시장에서 탄탄하게 성장해 왔고 앞으로도 이 분야만큼은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해요. 또 러시아와 중동 등 해외 진출, 신소재 사업 육성 같은 새로운 것들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가운데 한두 개만 성공해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10년쯤 더 지나면 그때는 150년은 문제없다고 할지도 모르죠.(웃음)1950년 서울 출생. 73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79년 미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석사. 88년 미 오하이오주립대 철학 박사. 90년 샘표식품 기획이사. 97년 샘표식품 사장(현). 2008년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현).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