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함을 참 오랜만에 불러보았네요. 가슴 한 구석 깊게 맴돌던 세 글자였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25년 전에 멈춰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서울에 올라오게 됐습니다. 아버지의 유언 덕분이었죠. “얘를 서울에 데려가서 공부시켜라”는 말씀을 남기신 덕분에 경찰 공무원이었던 큰형님 댁에 머무르게 됐지요. 또 청렴 경찰의 표상이었던 형님의 삶을 곁에서 본 덕분에 오늘에 이르렀군요. 아버지, 인생에 결ㅐ岵?기회가 세 번 있다지요.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제겐 분명 인생의 첫 번째 ‘매치포인트’였다고 여겨집니다.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네요. 그건 아버지를 음성으로 기억할 수 있는 시간보다 그리워해 온 시간이 배가 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도 가슴에 수놓은 타투처럼 항상 뇌리를 맴도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네요. 그 시절엔 담임선생님이 가가호호 가정방문하는 시간이 있었잖아요. 집에는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깡촌’이었으니, 제대로 대접할 것도 변변치 않아 송구스러워 했죠.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사실 그때 제 꿈을 처음 세웠던 것 같아요. 담장 너머로 아버지와 선생님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고 말았어요.“윤섭이가 미술에 큰 소질이 있는 것 같으니 나중에 미술대학에 보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네~, 그것이….”전 그 순간 뒷말을 흐리신 아버지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선생님의 말씀만 귓바퀴를 맴돌더군요.하지만 8남매를 간수하셨던 집안 형편으론 대학, 그것도 미술대학은 꿈도 못 꿀 일이었죠. 아버지께선 병환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때의 일에 가슴앓이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몸이 허물어져 가는 동안에도 저의 작은 꿈을 지켜주고자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제 가슴이 저립니다. 그리고 너무나 감사합니다.아버지, 기억나세요? 음~. 이번엔 초등학교 5학년 때일 겁니다. 경운기 옆자리에 저를 태우고 갈산 5일장에 나갔잖아요. 어둑해질 무렵 되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선 ‘인생을 살아가는 법’에 대해 말씀하셨지요.“인생을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단다. 나 혼자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도 있단다. 그러니 너도 뜻을 크게 품고 바르게 사는 법에 대해 항상 생각해야 한다.”솔직히 그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어요. 하지만 저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한밤중에 아버지와 단둘이 나눴던 그 얘기가 이렇게 값진 것이었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됩니다.그런데요, 아버지. 지난 주말에 아버지 말씀을 또 듣게 됐지 뭡니까. 그것도 우리 고향 지척에 있는 수덕사의 방장스님이신 설정 큰스님께 말이죠. 아내와 함께 일연스님(오래전에 출가한 제 누이) 안내로 설정 큰스님을 수 시간 뵐 수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바로 ‘욕생(慾生)’과 ‘원생(原生)’에 대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오욕(五慾)과 갖은 욕정으로 살아간다잖아요. 그러다 보니 괴롭고 혼란스럽고 허무한 나날을 살게 되는 것이 욕생이지요. 하지만 원생은 대의적인 삶입니다. 원래 깊은 마음속에 심지처럼 지니고 있었던 청정심을 깨닫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교훈이었죠. 그러면서 제게 ‘넓은 마음으로 원생의 삶을 펼치라’는 뜻에서 ‘홍원(弘原)’이란 법명을 내려주셨답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해주셨던 그때의 말씀이 곧 설정 큰스님의 가르침과 같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버지 사랑합니다.1969년 충남 홍성 출생. 동국대 미술학과 졸업 후 명지대 미술사 박사과정 중. 월간 미술세계 편집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 등 역임. 현재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이면서 문화체육관광부 국고지원사업 평가위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서울시립미술관·경기도립미술관 가격심의위원 등으로 활동. 저서로 ‘그림좋다’가 있다.김윤섭·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