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부터 2002년까지 무역 회사에 다니면서 신발 수출을 위해 부지런히 발품을 팔던 때가 있었다.북미 유럽 일본 등을 돌아다니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가 찍힌 신발을 팔러 다닐 때면 항상 해당 국가의 소매시장을 둘러보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다. 그래야 글로벌 트렌드나 아이템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테고리 킬러 스타일의 멀티숍을 처음 본 것도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카테고리 킬러(category killer)란 여러 브랜드의 상품을 한곳에 모아 놓고 소비자들이 가격이나 스타일 등을 비교 분석해 가며 구입할 수 있는 매장을 의미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로선 상당히 센세이셔널한 느낌이었다. 당시 해외 카테고리 킬러는 브랜드 이미지 위주의 고급스러움보다 상품 위주로 매장을 디스플레이 해 고객들이 쉽게 매장을 찾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었다. 또 신상품과 할인 상품을 함께 진열해 스타일, 유행 위주의 판매 방식을 가격 위주로 바꾼 것도 매우 획기적이었다고 생각된다.필자가 지난 2002년부터 카테고리 킬러인 ABC마트를 국내 처음 시작하게 된 것도 그간의 경험이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7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 카테고리 킬러가 많이 등장한 것을 보며 뿌듯한 생각도 든다. 최근에는 백화점에도 청바지, 트레이닝복, 러닝화, 문구류, 모자만 모아서 판매하는 전문 코너까지 생길 정도로 카테고리 킬러는 어느새 우리 생활과 친숙해졌다.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1990년대 장기 불황 이후 카테고리 킬러가 급성장했다. 불황의 늪 속에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의식이 바뀌면서 관련 시장이 큰 폭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 같은 트렌드는 요즘과 같은 경제 위기 속에도 여전하다. 일본 ABC마트 매출이 매년 급성장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그렇다고 카테고리 킬러라는 유통 환경에 너무 안주해서는 안 된다. 먼저 독창적인 매장 환경과 경영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아직 초기 단계여서인지 모르지만 후발 기업들이 무조건 베껴 쓰는 것은 우리 유통 업체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다.둘째, 전통적인 매장 운용 형태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한두 개 매장이 잘되면 바로 대리점 모집으로 확대하는 방식은 ‘달콤한 독 사과’와 같다. 직영점 형태로 운영해 노하우를 축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돼야 통일성이 유지될 수 있다.셋째, 고객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매장을 개편해야 한다. 최근 오픈하는 카테고리 킬러들은 지나치게 이미지 위주로 매장을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고객 입장에선 매장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초창기 카테고리 킬러가 소비자와 상품 간 간극을 줄이는데서 시작한 것을 유념해야 한다는 얘기다. 유통 방식의 변화라는 초심에서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누구나 쉽게 들어와 부담 없이 상품을 보고 만지고 고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카테고리 킬러의 최대 장점이 아닌가. 지나치게 상품을 치장하는 인테리어, 볼륨감 있는 디스플레이, 재고까지도 노출시켜 상품의 구색과 양을 맞추는 방식은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카테고리 킬러 시장의 심각한 왜곡을 불러일으킬 요인이다. 상품만 많이 갖추기보다 철 지난 이월 상품 등을 과감하게 할인 판매해 소비자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자세가 필요하다.시장은 결국 소비자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는 더더욱 중요한 요소다. 소비자가 외면하는 시장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경제 상황이 급변하고 소비자의 의식도 많이 변화하는 지금, 카테고리 킬러가 새로운 유통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길 기대해 본다.약력: 1962년생. 86년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92년 삼영 인터내셔널 대표. 97년 메이슨 인터내셔널 대표. 2002년 ABC마트 코리아 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