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연중 특별기획: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⑩ - 오너 경영, 선도 악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주식이 분산된 기업이 우량 기업이고 선진 기업이라는 시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과연 가족 기업은 정말 후진적인 제도에 불과할까. 해외의 많은 사례들은 가족 기업이 주식이 분산된 기업에 비해 신속한 의사결정과 장기적 관점에 유리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한발 벗어나 있는 스웨덴의 발렌베리그룹이 대표적인 사례다.글 싣는 순서1부.경제성장 원동력 ‘기업가 정신’2부.다시 생각하는 ‘경영권 승계 논란’1회. 손질 필요한 상속세제2회. ‘1주1표제’ 절대선인가3회. 오너 경영, 선도 악도 아니다4회. 200년, 300년 기업 만들자가족 기업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정의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가족 기업은 특정 가문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기업 혹은 기업집단으로 한정할 수 있다. 가족 기업으로서의 중소기업은 대부분 상장되지 않아 창업자나 창업자의 가문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그런데 대기업이 특정 가문에 의해 지배받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대기업은 고용과 투자의 주체로서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이들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이 특정 가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특정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대기업이 특정 가문에 의해 좌우되는 지배 구조는 후진적이거나 전근대적이고 세계의 선진 글로벌 기업은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는 주식이 분산된 기업이 우량 기업이고 선진 기업이라는 시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정부가 이런 지배 구조를 가진 기업이 많은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금융 인센티브를 준 때도 있었다. 가족 기업이 후진적이라는 주장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합리적인 근거에 기초해 있다고 보기 어렵다.첫째, 세계 각국 대표 기업의 지배 구조를 보면 대부분 특정 주주가 해당 대기업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 지배 주주의 상당수는 창업 가문의 자손이다. 즉, 경험적으로 볼 때 가족 기업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시대 상황이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각국 기업 지배 구조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 존속되고 있다.둘째, 가족 기업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기업의 장기적 이익을 도모하는 관점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업 경쟁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스웨덴의 최대 기업집단인 발렌베리 그룹은 바로 이러한 가족 기업이 지닌 장점 때문에 최근 금융 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우선 각국 대표 기업의 지배 구조를 보면 기업의 지배 구조가 경제적 효율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경영권을 지배하는 자가 시장 상황의 변화에 그릇되게 대처해 경영권이 바뀌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대기업이 가족 기업에서 주식 분산 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변화의 동력은 정치적 사회적 상황 변화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화가 극심하게 일어났던 미국의 경우 가족 기업인 대기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은 반면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가족 기업으로서의 대기업이 지배적이다.가령 벨기에는 상장 기업 중 93.6%가 25% 이상의 의결권을 지닌 대주주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오스트리아(86%) 독일(82.5%) 네덜란드(80.4%)의 경우 80% 이상의 기업이, 스페인(67.4%) 이탈리아(65.8%) 스웨덴(64.2%)에서는 60% 이상의 기업이 특정 대주주가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독일은 특정 대주주가 법인인 경우가 많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 대주주의 상당수는 특정 가문이다.기업의 주식이 널리 분산돼 있어 대주주가 존재하지 않고 이 때문에 창업자의 가문으로 기업의 지배권이 승계되지 않는 것은 영미계 기업의 독특하고 제한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영국은 15.9%의 기업만이, 미국은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 기업 중 7.6%, 나스닥 등록 기업 중 5.2%만이 특정 대주주에 의해 지배된다.유럽과 영미 국가가 이렇게 상이한 기업 지배 구조를 갖는 것은 대기업에 대한 규제의 차이이고 그 배경에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가 도사리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19세기 말 이래 대기업이라는 경제적 권력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반발이 있었다. 이것이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강력한 반독점법으로 이어졌다.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 또한 대중의 변화에 부응해 반독점법을 강화하는데 앞장섰다. 대공황을 겪으면서 도입된 글래스-스티걸 법에 의해 금융사를 매개로 비금융사를 지배하는 관행이 중단됨으로써 미국에서 대기업집단은 전면적 해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특히 미국 대기업 중 가족 기업이 적은 것은 농촌 지역의 발전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도시 지역에 기반을 둔 대기업에 대한 미국 각 지역(농촌)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연방제 국가라는 점에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작용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갈등이 심각하게 노정됨으로써 대기업의 횡포에 대해 중소기업이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했고 이것이 미국 의회와 행정부, 그리고 법원의 대기업에 대한 태도에 반영됐다. 기업의 지배 구조는 단순히 경제적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정치·사회적 변화의 산물인 셈이다. 반면 유럽 대륙 국가에서는 일반 국민들의 대기업에 대한 반감이 두드러지게 분출되지 않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적절한 타협이 이뤄졌고 이 때문에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강력한 반독점법이 실행되지 않았다. 기업의 성장을 위해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기업이 상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창업자나 창업 가문의 지배권을 존중하는 방안이 사회적으로 강구됐다. 차등 의결권, 피라미드, 상호출자 등의 장치를 사용할 수 있었고 이를 불법화하려는 시도가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즉, 창업자 가문과 사회가 적절하게 타협하는 사례가 유럽 지역에서는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사회는 기업이 상장함에 따라 고용과 투자를 확대한 결과 그 과실을 나눠 갖게 됐고 기업의 창업 가문은 지배권을 잃지 않았다. 이 점에서 가족 기업이라는 지배 구조나 차등 의결권 등의 제도적 장치는 후진적인 것도 아니고 전근대적인 것도 아니다. 만약 이러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가족 기업은 그대로 상장보다는 중소기업에 머무르는 선택을 했을 것이고 이들 나라 국민경제는 훨씬 더디게 성장하고 피고용자의 숫자가 덜 늘어나게 되는 그런 사회로 변모했을 것이다.가족 기업의 존속이 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고 창업 가문과 사회가 합의해 이뤄졌다는 것만으로 선진국에서 가족 기업이 번영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기업이란 경쟁력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시장에서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존립할 수 없을 것이고 이 경우 제도적 장치가 있건 없건 창업 가문의 기업 지배권은 단절됐을 것이기 때문이다.가족 기업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가족 기업은 주식이 분산된 기업에 비해 신속한 의사결정과 장기적 관점을 견지한다. 가족 기업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배당보다 자본의 축적을 중시함으로써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도모한다는 것도 가족 기업의 장점으로 꼽힌다.세계적으로 대표적인 가족 기업으로 꼽히는 발렌베리 기업집단은 최근 금융 위기에서도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 계열사인 SEB은행이 보유한 부실 자산 규모는 전체 자산의 0.8%에 불과하다. 유럽 그 어떤 은행보다 낮은 부실 자산 규모다.발렌베리 기업집단의 지주회사인 ‘인베스터(Investor)’가 2009년 초에 내놓은 2008년 실적 보고서를 보면 주가 하락에 따라 보유 주식의 가치가 떨어진 것 이외에 별다른 흠을 찾을 수 없다. 여타 투자 회사에 비춰볼 때 계열사의 영업 실적이나 이익 규모라는 점에서 월등히 앞선다.그 이유에 대해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발렌베리 계열 지주사가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계열사들에 현금 지원을 할 역량을 갖추고 또 경기 침체기에 성장성을 지닌 기업이나 자산을 매우 낮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충분한 현금은 위기가 발발하기 전 보유 자산을 미리 처분한 결과였다. 지주사 인베스터는 2008년 초 트럭 제조업체인 스카니아(Scania)와 북유럽 증권거래소(OMX)에 대한 보유 지분을 매각했다.이 때문에 인베스터의 지분을 갖고 있는 발렌베리 가문 이외의 주주들은 지주사 ‘인베스터’의 사업 역량과 실적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부 주주들은 금융시장 상황이 좋았던 시점에 인베스터가 새로운 기업을 매입하지 않거나 혹은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주주에게 배당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해 왔다. 사실 대부분의 지주사들은 이런 금융시장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인베스터는 달랐다. 인베스터는 외부 주주들의 압력에 대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는 지배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차등 의결권을 통해 발렌베리 가문과 이들이 지배하는 재단이 안정적 의결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외부 주주들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았다.전문가들은 인베스터가 다른 지주사들이 갖지 못한 두 가지 장점이 있다고 분석한다. 첫째, 인베스터는 인수·합병의 위협에 놓이거나 단기적 수익을 추구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보다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주요한 경영 결정을 내린다. 둘째, 주주와 경영진과의 이해관계가 잘 일치한다.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는 2007년 초에 특정 가족이 지배하는 상장 기업으로 인덱스를 개발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인덱스를 개발한 이유를 주식이 광범위하게 분산된 기업에 비해 특정 가족이 지배하는 기업의 실적이 뛰어난 것으로 입증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실제로 가족 기업과 주식 분산 기업의 실적에 대한 비교 연구에 따르면 창업자가 지배하는 기업의 실적이 주식이 분산된 기업에 비해 일반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이 확인된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창업자의 후손이 승계한 기업은 창업자 시절에 비해 실적이 떨어지는 경향이 발견된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차등 의결권과 같은 특정한 제도적 장치가 있을 경우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이 점과 관련해 결국 중요한 것은 창업자냐 창업자의 후손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창업자가 보여주었던 기업가 정신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발휘되느냐의 문제다. 창업자의 후손이 특별한 의결권 장치나 재단을 통해 기업집단을 지배하더라도 그 후손들이 새로운 창업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경우에는 주식 분산 기업보다 훨씬 우월한 실적을 나타낸다.오늘날 한국의 주요 대기업이 특정 가문에 의해 지배되는 대기업집단의 일원인 것도 한국이 겪은 경제 발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 한국의 기업 환경은 기업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금융시장, 교육 시스템, 예측 가능한 정부 정책 등이 취약한 상황이었다. 특정 가문이 지배한 대기업 집단은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훌륭한 역할을 했다. 상호출자나 순환출자를 통해 이른바 가공 자본을 창출하고 지급보증함으로써 제대로 된 신용 평가 능력을 지니지 못한 금융시장으로부터 자금을 공급 받을 수 있었다.가족 기업으로서의 대기업집단은 자원의 제약과 불확실성하에서 급속한 기업 성장과 경제 발전을 이룩하려는 정부의 파트너로서 성장한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그 이전에 그나마 존재했던 대기업집단에 대한 모든 특혜적 요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1등 기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이들 가족 기업들은 보여주었다. 창업 가문의 2세대들이 창업 세대를 뛰어넘은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주식이 분산되고 개개 기업이 자신의 단기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영 풍토였다면 우수한 인재들을 기업에 유치하고 키우면서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흔히 ‘재벌 체제’라고 불리는 문제점의 상당 부분도 극복됐다. 차입 경영, 저수익 경영, 과잉 투자, 취약한 경영진 규율 기능, 회계 보고 및 공시의 불투명성 등은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해소됐다.가족 기업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들이 주식 지분 분산 대기업에 비해 항상 우월한 실적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족 기업이 후진적이고 전근대적인 지배 구조이며 이 때문에 해소돼야 할 지배 구조가 아닌 것임은 더욱 분명하다.1960년 강원 거진 출생. 88년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96년 영국 런던 정경대 국제정치경제학 박사. 2002년 동아일보 기자.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현).김용기·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 ykim@s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