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기 인간개발연구원 회장

늘 바쁜 정·재계 리더들에게 아침 7시 조찬 강연회는 하루 중 유일하게 배움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다. 수많은 기업, 단체, 연구소 등에서 강연회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국내 조찬 강연회의 효시는 인간개발연구원이 1975년 시작한 ‘월례회’로 알려진다. 월례회는 월 1회로 시작했지만 뒤이어 시작한 인재개발연구회는 매주 목요일 조찬 강연회를 열었다. 1978년 이 두 모임이 통합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6월 11일 인재개발연구원의 조찬 강연회는 1600회를 맞이한다. 무려 34년 동안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한 주도 쉬지 않고 이어진 것이다.한 주도 쉬지 않은 것은 강연회뿐만이 아니다. 이를 처음 시작한 장만기(73) 인간개발연구원 회장 또한 한 번도 쉬지 않고 매주 조찬 강연회를 지킨 대한민국 성장사의 산증인이다. ‘미스터 스터디’라는 별명은 그의 꾸준한 노력에 딱 맞아떨어진다. 쏟아 부은 시간만큼이나 장 회장이 인간 개발, 즉 HRD(Human Resource Development) 분야의 달인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인적자원을 통해 조직을 변화시키고, 기업 또는 기관의 체질을 바꾸고, 나아가 국가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신념이 그가 이 일에 매달리는 이유다.조찬 강연회는 1975년 2월 5일 조선호텔에서 30명의 사람을 모아 처음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Gross National Product)이 100달러도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한국이 가진 것은 인적자원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 개발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사람에게 희망과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관한 문제를 이해하고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어떻게 기업이 소화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처음에는 산학 협력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교수들이 강의하고 기업인들이 듣는 형태였다면 이후 국가기관 연구소 언론계 책임자들을 초청했습니다.1980년에는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조순 전 부총리가 나왔고 1998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조찬 모임을 통해 정치 재개를 선언했습니다. 이게 정치인들이 우리 연구원에 대거 참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최근에는 지방자치아카데미와 육군혁신아카데미 등 광범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하는 일이 워낙 많습니다. 지금은 한국개발연구원(KDI) 같은 정부 연구소도 있고, 경제단체연구소, 기업연구소, 대학연구소가 많은데 우리 연구원은 중립적 차원에서, 또 오너 경영인보다 전문 경영인 위주의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초기 멤버들로는 정수창 전 두산그룹 회장, 박승찬 전 금성사 사장, 조권순 전 유한양행 사장 등이 참여했습니다. 오너 기업에 대항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조와의 관계를 예상하면서 중립적 차원의 연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기업이나 정부로부터도 예산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1500명의 개인 회원들이 내는 소액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고 재정적 자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때문에 지난 34년 동안 참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독립적 기관이 34년을 이어온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 사회의 빈부 대립을 중간자 입장에서 대화를 이끌고 변화를 주도했기 때문입니다.사람은 다 꿈이 있습니다. 저는 석사 때 우연히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를 보게 됐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당시 저는 인사관리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성취동기(Achievement motivation can be developed)에 관한 글이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당시 한국은 너무 빈곤한 저개발 국가였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로 살았는데 미국의 원조는 미국 제품을 팔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글은 미국의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대신 개발 국가의 성취동기를 키우라는 얘기였지요. 이를 토대로 ‘기업 경영자 개발에 관한 성취동기 연구’라는 석사논문을 썼습니다.운이 좋았는지 서른 살에 서울대 추천으로 명지대 교수가 됐는데, 당시 유상근 학장(명지학원 설립자)이 뉴욕타임스 일요판을 던져주며 ‘이것으로 한국 홍보를 해 보라’고 지시한 겁니다. 모르는 분야를 공부하려니 당황하기도 했는데 당시 공보수석인 한기욱 박사를 만나 국가의 상황을 들어 보았습니다.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경제 개발을 해야겠는데 국고에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투자를 유치해야 하고 이를 위해 국가를 홍보해야 했습니다.당시 뉴욕타임스 지면에 8페이지에 걸쳐 ‘코리아 서플먼트(Korea Supplement)’라는 특집이 나갔습니다. 정부에 돈이 없어서 현대건설 대림건설 쌍용양회 삼성물산 등의 기업으로부터 광고비를 지원받았지요. 이 일이 있은 뒤 교수직을 벗어던지고 코리아마케팅을 설립한 겁니다.1972년 기독교 관련 단체의 한국 대표로 아프리카 유럽 미국 등지로 두 달 동안 나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각 신문사를 발로 뛰어다니며 거래처를 뚫던 때였죠. 그러던 중 한국에서 10월 유신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외 언론이 한국을 보는 시선이 싸늘해지더군요.저의 모든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꿈을 접고 평소 흠모하던 미국의 폴 마이어(Paul Meyer) 교수를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습니다.귀국해 보니 회사는 부도가 났더군요. 돈 한 푼 없이 연구원을 세웠습니다. 폴 마이어의 프로그램은 통관이 되지 않아 포기해야 했습니다. 대신 사람들은 성공 사례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에 착안해 최고경영자를 위한 조찬 강연회를 시작했습니다.반영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는 노동력 공급 위주였습니다. 경영자는 싼 임금을 이용해 돈을 많이 남기는 것이 과제였고요. 그러나 과거 경영자의 생각과 민주화·세계화된 오늘날의 경영자의 자질은 다릅니다.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가 지금은 통하지 않습니다.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지금은 존경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시대를 앞질러 창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리더십의 위기 시대입니다.사람 하나의 힘이 참 대단합니다. 그래서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장기적으로 정부·기업의 후원과 인적자본이 합쳐진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도 참여하도록 할 계획이고요.이름은 PTGS그룹으로 정했습니다. 피플(people) 테크놀로지(technology) 글로벌 솔루션(global solution)을 뜻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교육 문화 건강 창조 환경 자원 분야를 아우르는 사업을 할 예정입니다. 우리 연구원이 기업에 노하우를 전해 주고, 기업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키울 겁니다.이를 통해 월드뱅크와 같은 미래 창조 투자 그룹을 키워 나가려 합니다. 또 환경 회복 사업, 인간성이 실종된 사회를 재건하는 사업, 미래 사업을 기획하고 있습니다.또 세종시의 교육을 도맡게 돼 지구환경대학원, 국제의료복지대학원, 아시아리더십 대학원 등 여러 교육 사업을 할 계획입니다.이 계획들이 지금은 거시적인 형태지만 내년 말까지는 구체화할 계획입니다. 꿈을 가지면 이뤄진다는 신념을 갖고 할 생각입니다. 이런 계획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꿈꾸는 것은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에 기여하는 인재를 키우는 것입니다.1937년생. 1968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경영학석사). 1968년 명지대 교수. 1969년 (주)코리아애드 이사. 1970년 (주)코리아마케팅 대표이사. 1985년 UCLA경영대학원 국제경영자과정 수료.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연수원 강사. 1990년 한국 엘엠아이(주) 대표이사 회장(현). 1994년 미국 지구환경대학원 명예환경학 박사. 2001년 한국인간개발연구원 회장(현). 2004년 중국 동북사범대 객원교수, 길림대학 고문교수(현).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