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24시

한국은 외화보유액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1997년 외화보유액이 332억 달러까지 쪼그라들면서 들이닥친 외환위기의 충격은 그야말로 ‘트라우마(trauma)’로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외화보유액을 놓고 적정성 논란이 일고 있는 이유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상흔이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화보유액을 무조건 늘리거나 줄여야 한다는 게 적정성 논란의 핵심은 아니다. 적정성은 말 그대로 ‘우리 경제의 체력에 비춰볼 때 어느 정도가 적절한 수준이냐’는 것이다.외환위기 이후 경상수지의 흑자 반전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외화보유액은 2000년 들어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즈음 논란이 됐던 사안은 ‘과도한’ 외화보유액을 이용해 해외 투자에 나서야 하느냐, 아니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 외화보유액을 보다 보수적으로 운용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투자공사(KIC)가 설립되기도 했지만 외화보유액은 계속 불어나 지난 2007년 말 2622억2000만 달러에 도달했다.지난해 하반기 불거진 글로벌 금융 위기로 2012억2000만 달러까지 감소했던 외화보유액은 올 들어 3월부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5월에는 월 기준으로 사상 최대의 증가 폭을 보이면서 2267억7000만 달러까지 불어났다. 외화보유액을 구성하고 있는 자산들은 △유가증권 1944억3000만 달러(85.7%) △예치금 313억5000만 달러(13.8%) △금 8000만 달러(0.04%) 등이다.하지만 최근 한국금융연구원 등을 중심으로 외화보유액을 3000억 달러 규모로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다시 적정선 논란에 불이 붙는 분위기다. 현재 외화보유액 수준으로는 글로벌 금융 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과 같은 돌발적인 상황을 감안하면 오히려 모자란다는 게 ‘확충론자’들의 주장이다. 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와 달리 자본거래 외에 외국인 포트폴리오 투자 자금 유출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계산하면 적정 외화보유액은 3000억 달러가 넘는다”고 분석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도 “소규모 개방경제 특성과 안보 불안 요소 등을 감안하면 3000억 달러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외환 당국자들은 적정 외화보유액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급변하는 세계경제 상황에서 외화보유액의 확충과 운용 전략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외화보유액의 인위적 확충은 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환율 조작국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이런 논의를 피하고 싶어 한다.실제 안병찬 한국은행 국제국장은 “외화보유액을 인위적으로 쌓으면 환율 조작국이라는 국제사회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손병두 기획재정부 외화자금과장도 “특정 숫자를 목표로 외화를 쌓는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적정 외화보유액에 대해서는 단일화된 기준이 없을 뿐더러 정부는 (여러 기준 가운데) 특정 견해를 채택하고 있지도 않다”고 밝혔다.특히 한국은행은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매수할 경우 통화량이 확대돼 인플레이션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이다. 증권이나 부동산 시장의 과잉유동성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정부는 대신 경상수지 흑자 기조와 매달 발생하는 운용 수익을 통해 외화보유액을 늘려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과정이라고 본다. 인위적인 외화보유액 확대는 외채 발행 등과 같이 ‘마이너스 통장’이 늘어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2년 전 보고서를 통해 외화보유액 과다 논쟁을 촉발했던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연구실장이 “적정 외화보유액은 외채 규모와 구조, 대외 환경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단기 외채가 늘었고 전대미문의 금융 위기를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선 적정 외화보유액을 논의하기보다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금융 협력을 강화하는 등 큰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정부 기조와 다르지 않다.박신영·한국경제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