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의 전자책 단말기 ‘킨들(Kindle)’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업그레이드 모델인 ‘킨들2’는 지난 2월 시장에 나오기 무섭게 30만 대가 팔려나갔다. 신문·잡지와 교과서 시장을 겨냥한 한층 매력적인 제품 ‘킨들DX’도 5월 초 공개됐다. 킨들의 화려한 탄생은 500여 년 전 혁신적인 활판 기술로 인쇄업에 뛰어든 구텐베르크를 연상시킨다. 아마존은 종이를 대체하는 ‘21세기의 구텐베르크’가 되겠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는다. 킨들의 대히트는 국내 전자책 업계도 흥분시키고 있다.지난 2007년 11월 미국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킨들’이라고 이름 붙인 전자책 단말기를 처음 내놓았을 때 성공을 예감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자책은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IT) 붐을 타고 한차례 한껏 부풀어 올랐다 터진 잊혀진 ‘미래 유망 시장’ 중 하나였다. 언젠가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지만, 아직 성공 사례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전문가들도 킨들의 성공 가능성에 반신반의했다.아마존의 판단은 정확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무선으로 책을 구매하고 내려 받아 읽을 수 있는 이 혁신적인 단말기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킨들은 359달러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2008년 미국 10대 히트 상품에 선정됐고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쇼핑 시즌에는 물건이 동나 팔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2007년 말 나온 ‘킨들1’은 지금까지 40만 대가 판매됐다. 지난 2월부터 판매가 시작된 업그레이드 모델 ‘킨들2’도 30만 대가 팔려나갔으며 올해 판매량 80만 대를 예상하고 있다. 게다가 화면이 훨씬 커지고 기능이 개선된 ‘킨들DX’ 모델까지 최근 추가됐다. 아마존은 킨들의 성공 덕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는 불황 속에도 웃고 있다.킨들을 처음 본 사람들은 종이 느낌을 그대로 살린 화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e잉크 기술로 만든 전자종이를 디스플레이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종이는 백라이트 유닛이라는 초소형 형광등 빛을 이용하는 기존 액정표시장치(LCD)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미세한 검은색과 흰색 입자가 전기신호에 반응하면서 글자나 그림을 표시하기 때문에 가독성이 뛰어나고 장시간 읽어도 눈이 아프지 않다. 더구나 종이처럼 막대한 산림을 벨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친환경 녹색 소재라는 장점도 갖췄다.킨들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5월 초 나온 킨들DX는 킨들2에 비해 훨씬 커진 9.7인치(24.6cm) 디스플레이를 장착하고 있다. 무게는 536g, 두께 0.97cm에 4GB 메모리로 단행본 3500권을 저장해 다닐 수 있다. 배터리 용량도 늘어나 한 번 충전하면 최대 2주 동안 사용 가능하다.킨들의 가장 큰 성공 비결은 콘텐츠다. 킨들은 무선 기능을 장착하고 있다. 미국 3위 이동통신사인 스프린트의 통신망과 연동돼 아마존이 보유한 전자책 28만 권과 일간신문 37종, 잡지 28종, 유명 블로그 1500여 곳의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나 내려받아 읽을 수 있다. 집과 사무실은 물론이고 달리는 버스 안이나 길거리, 심지어 해변가에서 휴가를 즐기다가도 원하는 책과 신문을 바로 받아볼 수 있는 것이다. 킨들은 매일 새벽 4시에 고객이 구독하는 신문들을 자동으로 내려 받는다. 구독료는 신문이 월 6~15달러, 잡지는 호당 1.25~3.5달러로 저렴하다.킨들은 사상 최대의 경영난에 직면한 신문사와 잡지사에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유력 신문들이 모두 킨들에 콘텐츠를 제공한다. 타임과 뉴스위크, 뉴요커 등 잡지도 마찬가지다. 미국 고등 교육 교재 시장을 대표하는 피어슨 등 주요 출판사도 콘텐츠 공급을 준비하고 있다. 또 애리조나주립대, 프린스턴대 등 6개 대학 학생들은 올 가을 학기부터 무거운 전공 서적 대신 킨들 단말기를 들고 다니게 된다.킨들을 성공시킨 아마존은 ‘출판계의 애플’을 꿈꾼다. MP3 플레이어 아이팟과 음원 판매 사이트 아이튠(iTune)을 통해 음악 산업을 장악한 애플처럼 전자책 시장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소설가 부인을 둔 제프 베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의 남다른 야심은 ‘킨들’이라는 제품명에서도 읽혀진다. ‘촛불(Candle)’을 뜻하는 노르웨이 고어에 어원을 둔 ‘킨들(kindle)’은 ‘불을 켜다, 밝게 하다’는 의미와 함께 기존 종이책을 불태우는 이미지도 떠올리게 한다.아직 아마존은 미국 내에서만 킨들을 판매한다. 하지만 국내 전자책 업계는 킨들의 성공에 자극받아 벌써부터 달아오르고 있다. 특히 전자책 단말기 생산 업체인 네오럭스 강우종 사장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전자책 단말기는 네오럭스가 2007년 7월 개발한 ‘누트(NUUT)’가 유일하다. 킨들과 똑같이 미국 벤처기업인 e잉크의 기술을 적용한 전자종이를 디스플레이로 쓴다. 단말기 출시는 네오럭스가 아마존보다 한발 앞섰지만 결과는 엇갈렸다. 네오럭스는 출판사, 신문사와 제휴를 통해 꾸준히 콘텐츠를 늘려나갔지만 좀처럼 고전을 면치 못했다.네오럭스는 5월 말 새 모델인 ‘누트2’를 선보인다. 미국에서 킨들의 대히트로 시장 분위기가 달라진 덕분이다. 한층 세련된 디자인과 와이파이(Wi-Fi) 무선 인터넷 기능이 가장 큰 변화다. 동작 속도도 빨라지고 메모리도 1GB로 늘어났다. 콘텐츠도 크게 강화됐다. 기존 조선일보에 이어 국민일보가 5월 초부터 누트를 통해 콘텐츠를 공급한다. 한국경제와 매일경제, 서울신문도 조만간 서비스가 예정돼 있다.물론 과거 전자책 단말기 개발에 뛰어든 업체는 네오럭스뿐이 아니다. SK텔레콤은 2007년 ‘티 리베(T-Libe)’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개발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한 적이 있다. 아이리버도 같은 해 ‘북2’를 선보였다. 하지만 모두 본격 양산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시제품 단계에서 멈춰버렸다. SK텔레콤은 지난해 12월 말 네오럭스와 전자책 단말기 개발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다시 시장 진입을 서두르고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아마존 킨들은 풍부한 콘텐츠에 네트워크를 결합해 성공한 사례”라며 “SK텔레콤은 거꾸로 네트워크에서 콘텐츠로 나가는 접근”이라고 말했다. 아이리버도 올 연말쯤 제품 출시를 고려하고 있다.최근 전자책 업계의 관심은 6월 출시가 예고된 삼성전자의 전자책 단말기 ‘파피루스’에 쏠려 있다. 파피루스는 A4 절반 크기로 사용자 편의를 위해 터치스크린 방식을 도입했으며 512MB 메모리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9.7인치 화면에 4GB 메모리, 무선 기능까지 갖춘 킨들과 비교하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번 제품을 전자책 사업의 본격 출발을 알리는 테스트 모델 성격으로 받아들인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파피루스의 출시 지역과 가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전체적으로 분위기는 한껏 고조돼 있지만 실제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곳은 아직 많지 않다. 전자책 시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연 미국에서 킨들이 성공했다고 한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국내 콘텐츠 업체들은 ‘전자책’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전 전자책 붐에 들뜬 국내 120여 개 출판사들은 자본금을 모아 북토피아를 설립했다. 이 업체는 1200여 개 공공 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에 전자책을 납품하는 등 한때 1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미지급 저작권료와 부채 누적으로 지난해 부도 위기에 빠졌다. 시장 주도 사업자의 부재, 기업간 거래(B2B) 중심의 기형적 시장구조, 철 지난 콘텐츠 등이 국내 전자책 시장 침체 요인으로 꼽힌다.북토피아에 주주사로 참여했던 국내 1위 인터넷 서점 예스24는 최근 독자적인 전자책 사업을 선언했다. 예스24는 이를 위해 업계 4위인 알라딘과 MOU를 맺고 전자책 사업을 전담할 독립 법인을 공동 출자해 설립하기로 했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성공에 크게 고무돼 있는 예스24는 네오럭스 등 전자책 단말기 업체들과도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다.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디지털 교과서 사업’도 전자책 시장 활성화에 큰 변수가 될 전망이다. 디지털 교과서는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를 대체하는 것이다. 현재 초등학교 5학년용 6종, 6학년용 4종이 개발돼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올해 92개 초등학교에 디지털 교과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107억 원을 투입한다. 2013년까지 시범 사업을 끝내고 전면 도입에 나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전자책 단말기의 원천 기술을 갖고 있는 곳은 미국 벤처기업 e잉크다. 1996년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 다니던 조셉 제이콥슨이 새로운 전자 종이 기술을 개발해 e잉크를 설립했다. 아마존의 ‘킨들’과 소니의 ‘리더’, 그리고 네오럭스의 ‘누트’ 등이 모두 e잉크의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e잉크의 핵심 기술은 사람 머리카락 직경 크기의 마이크로 캡슐에 있다. 캡슐 안에는 수백만 개의 흑색과 백색 입자가 들어 있다. 이들이 전극에 가해지는 전기에 따라 움직이며 글자와 여백을 만들어 낸다. 음극 전기장을 가하면 흰색 입자가 캡슐의 위쪽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되면 이 부분은 전자종이에서 흰색, 즉 여백이 된다. 전기 자극을 반대로 가하면 흑색 입자 표면으로 떠오르고 흰색 입자는 아래쪽으로 숨는다.일반 액정표시장치(LCD) 제품은 화면 뒤쪽에 초소형 형광들이 들어가 빛을 낸다. 하지만 e잉크의 전자 종이는 흑백 입자가 움직이면서 글자와 그림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런 게 전혀 필요 없다. 이 때문에 전력 소모가 기존 LCD의 5%에 불과하다.e잉크는 원천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자책 단말기가 팔려나갈수록 로열티 수익이나 직접 판매 수익을 올린다. 그런 점에서 e잉크는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원천 기술로 세계적인 기업이 된 퀄컴과 비교되곤 한다. 강우종 네오럭스 사장은 “아직 규모 면에서는 미약하지만 향후 퀄컴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라며 “퀄컴은 대안이 있었지만 e잉크는 아직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요즘 전자책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은 네오럭스다. 국내에 하나뿐인 전자책 단말기 ‘누트’를 생산한다. 전자책 시장에 진입하려는 기업들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다. 강우종 네오럭스 사장은 5월 말 판매에 들어가는 ‘누크2’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단행본 콘텐츠와 제휴 언론사를 대폭 늘리고 무선 기능도 추가했다. 놀랍게도 강 사장의 타깃은 국내가 아니라 해외시장이다.그동안 무선이 지원되지 않아 매번 USB로 콘텐츠를 옮겨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와이파이(Wi-Fi)를 채택해 그런 불편이 사라졌다. 메모리도 1GB로 늘렸다. 이 정도면 1년 치 신문을 저장해 들고 다닐 수 있다.킨들은 엄청난 돈이 들어간 제품이다.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 오프라 윈프리가 킨들을 들고 나와 광고하지 않나. 어쨌든 누크는 킨들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누크2 가격이 29만9000원이다.신문들과 제휴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 최근 마이니치신문도 참여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 사람과 한국에서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주 타깃이다. 해외 교포들도 의외로 전자책 단말기를 많이 찾는다. 민음사, 북21 등 출판사들과도 계속 계약을 늘리고 있다. 책과 신문, 만화, 교육 서적 등 종이로 된 모든 것이 대체될 수 있다.그동안 전자책 업체가 많았지만 전부 PC 기반이었다. 많은 기업이 관심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 그 단계에서 멈추고 만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전자책은 단말기만 있다고 사업이 성립되지 않는다.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한국 시장만 보지는 않는다. 현재 세계에서 전자책 사업을 의미 있게 하는 곳은 아마존과 소니다. 이들은 미국 유럽 중심이다. 중동이나 스페인 동유럽 러시아 등 틈새시장에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